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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은 60 성상(星霜)의 목장길><109>농촌진흥 30년사 간행의 고초

표지에 현 청장 얼굴 부각 안한 탓 인쇄비 집행 지연
첫 외부인사 출신 청장에 반발심 작용…자체 비용 마련

  • 등록 2017.11.10 11:30:24
[축산신문 기자]


김 강 식 고문((사)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


구한말 1906년에 이곳 수원에서 권업모범장으로 시작해 일제하 농사시험장, 8.15 해방 후 농업기술원 농사원을 거쳐 1962년 4월 농사시험 연구사업과 새 기술의 농가보급 그리고 영농지도자 양성으로 농촌진흥 개발 기치를 걸고 농촌진흥청이 발족한 후 30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업적을 평가해보고 그 후 사업방향을 점검하기 위해서 농촌진흥사업 30년사를 간행하기로 했다.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은 1956년 3월에 미국국제협력처(ICA)의 요청으로 일행이 3월 13일부터 내한해 5월 21일가지 약 2개월에 걸쳐 전 후 한국 농촌과 농업을 현지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이른바 MACY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농촌진흥사상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농사시험 연구 및 민주적 농촌지도 체계를 갖추어 운영할 수 있도록 한 농사원의 발족이다.
농사시험연구 및 지도직 공채 1기로 1978년 1월에 농업연구사로 발령, 시험국 연구조사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농사원 직책은 일반 행정기능과는 다른 사업적 특성을 살려 나갈 수 있는 연구지도 기능을 4년여 지속해 왔으나 1961년 10월 군사혁명 정부의 대폭적인 정부기구 개편에 따라 농사교도법이 농사연구교도법으로 개정되었으며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내용을 시험연구사업과 농사지도사업으로 확연히 구분해서 농사연구사업의 새 분야로 농촌생활(의식주)에 관한 시험연구와 농촌발전을 위한 조사연구를 추가했고, 한편 농사교도법의 새 분야로서 농가부업과 수공업에 관한 지식기술의 보급, 자연자원의 보존과 이용에 관한 농민교육을 추가했다.
지금으로부터 57년전 미래의 한국 농촌농업을 전망한 직제개정이 있었다고 보나 사업은 미진했다고 본다.
본인은 1988년 3월 농촌진흥청 차장으로 취임하면서 농촌식생활 연구원을 농촌사회 발전연구원으로 개편하자는 의견도 제의했으나 당시 남북이 극한 대치하는 상태에서 ‘사회’라는 용어는 시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윗분의 의견에 따라 나의 생각을 접고 말았다. 이유인 즉 ‘사회’라는 용어는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 통념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란 의견이었다.
당시 농촌의 식생활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에 의한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물론 생활환경의 큰 차이에 따른 우리 농업과 농촌을 어떻게 유지 발전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또 하나는 본인이 농촌진흥청 차장 재임 시 농촌진흥 30년사를 회고해 보겠다는 깊은 뜻도 여기에 있었다.
집필진은 농사원 및 농촌진흥청 발족 시부터 근무한 연구직, 지도직, 행정직으로 구성, 편집위원장은 농촌진흥청 차장인 본인이, 위원은 농촌진흥청 국장 및 산하 시험연구소장, 집필은 소속기관의 과장이 집필하되 감수는 송춘종(농업기계화연구소장)과 11명의 위원이 검토 협의해 1993년 2월 총 6편, 36장, 1천289쪽의 농촌진흥 30년사가 1989년 10월 한국 농정 40년사에 이어 농촌진흥 30년사가 발행되었다.
동 농촌진흥 30년사 출판에 따른 비사를 참고로 남기려고 한다. 당시 동 간행물 인쇄비가 약 600만원인데 동 간행물 인쇄비 지출결제를 안 해주고 있어 당시 총무과장이 곤란한 처지였다.
본인과 편집주간 및 편집위원이 간행비 지출승인을 윗분이 안 해주고 있는 이유를 숙의했으나 찾아낼 수 없어 왜 지출결제를 안 하느냐 물어볼 수도 없고 해서 고민 끝에 총무과장, 편집주간, 본인이 사유를 생각한 결과 제일 앞장에 역대청장의 사진을 게재해야 하는데 당시 제1대부터 현9대 이동우 청장까지 1면에 동일 사이즈(명함판)의 사진을 등재했는데 현 청장을 전면크기의 사진으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짐작하게 되었다.
너희 골탕한번 당해보라는 속내였으나 당연히 편집위원장인 차장이 사과드리고 간행비 지출을 사정하면 어렵지만 지출결제를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1957년 7월 농사원이 발족한 이래 농촌진흥청장 자리에 농업전문가(농학박사) 이외에는 재직한 바 없는데 불미스러운 12.12 정변으로 전두환 대통령에 이은 노태우 대통령이 사무직 출신인 이동우 산림청장을 농촌진흥청장으로 발령했다. 전 연구지도직 공무원들이 농촌진흥청장을 깍듯이 모시고 일하고 있는데도 뭔가 오해로 인해 인쇄비 결제를 안해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전 연구지도직들은 정부예산과 관계없이 인쇄비를 마련하기로 했다.
당시 농촌진흥청 각 시험장 연구소와 관련 있는 종자, 종묘, 비료, 농약, 농기계, 잡종 등 관계 업체에 근무하는 회사 임원 및 사장이 농대 또는 농촌진흥청 선후배 관계이기 때문에 각 사로부터 50~100부를 구입해 각 회사 명의로 유관기관 및 업체에 기증해 달라고 했더니 업계의 호응이 너무 좋아 당초 발행계획 부수보다 몇 배 이상을 발행해 농업관련 업체가 출판사로부터 직접 구입, 관계기관 및 업체에 배부한 바 있다.
이 결과를 본 이동우 청장은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농업과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 잘못된 인사로 농업기술개발 및 농촌 농민을 지도하는 최고 기관장으로 왔다면 기존 기술직 공무원의 사기를 도와주는 업무처리를 해 주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있어 하나의 일화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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