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다소 가물거리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대목은 식량도 석유처럼 언제든 무기(武器)화될 수 있는 것인데도, 이 문제에 관한한 한국정부의 인식은 매우 ‘순진’(기고에는 나이브(naive)하다는 표현이었다)하기 그지없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최근 사태를 내다본듯한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우리 정부가 따끔한 충고로 받아들일만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식량(농업)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인식이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성사되려면 미국의 주요 관심품목인 쇠고기를 양보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다. 임박한 총선만 없다면 바로 공식화할 것이라는 게 농업 쪽의 일반적 인식이다.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그간의 협상자세는 식량문제에 대한 무지한 인식의 결과로밖에 볼 수 없는 사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 쇠고기가 중요하다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며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농산물도 마찬가지다. 쌀을 최대한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타 품목은 양보로만 일관해 왔다. 그럴 때마다 수출지향 형 경제를 들먹인다. 뒤집어 말하면 농축산물은 경쟁력이 없으니 공산품수출로 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경제논리로만 따진다면야 지구상에 농축산업이 살아남을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국제시장의 곡물시세는 이른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을 몰고 왔다. 주요 곡물수출국들은 수출을 엄격히 규제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식품업계는 원료곡물수출을 규제하자며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폭격을 맞은 월가의 투기자본 까지 식량장사에 나서고 있다. 지구상의 식량수급구조는 생산량을 몇 배 늘리는 그야말로 획기적 증산기술이 나오지 않는 한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식량을 사다 먹자고 말할 것인가. 이제라도 정부의 식량정책은 180도 선회해야 한다. 압력이 있으면 양보하고 그럴 때마다 모르핀주사와 같은 입막음정책을 양산하는 그간의 자세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요 농축산물에 대한 일정수준의 자급목표를 제시하고 이에 맞는 맞춤정책을 펴야 한다. 그래야만 농민이 정부를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얼마만큼은 자급한다는 목표도 없이 농업경쟁력을 외치는 건 한낱 공염불일 뿐이다.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거나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선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 캄보디아와 같은 외국자본을 기다리는 나라에서 민간이 곡물을 생산, 국내에 반입할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지원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곡물 값 폭등이 서민경제에 부담을 주고 있지만 축산현장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처해 있다. 축산이 무너지면 농촌경제가 붕괴된다. 축산업계가 이번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면 우리는 주요 식량인 축산물을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재앙에 직면할 것이다. 사막의 나라 사우디가 식량생산을 위해 해수를 담수로 만드는 데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 이스라엘이 낙농품자급을 위해 각종 지원정책을 펴는 것은 식량은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 정부의 선택을 지켜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