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을 이념에 입각한 조직뿐 아니라 자주성과 경쟁력을 갖춘 경영·경제조직으로, 한 차원 높은 시대성과 역사성을 갖춘 조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 하에 농협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현직 조합장으로서 몇몇 사항은 오히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듯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진정한 조합의 대표가 ‘대표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데모스(Demos, 시민)’와 ‘크라티아(Kratia, 권력 또는 지배)’의 합성어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로 “시민에 의한 지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시민의 지배, 즉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제도, 도구 중의 하나가 바로 선거이다. 선거는 한 사회가 그 대표를 선출하고 또 특정한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러한 선거가 갖는 중요한 본질은 선택의 자유이다. 자유로이 선택한 대표나 정책에 대해 우리사회 구성원은 믿고 따르게 된다. 선거라는 다수결의 원리를 통해 선출된 대표는 소신을 갖고 국가의 대표라면 정책을, 기업의 대표라면 경영을 하게 된다. 그 결과에 대해 국가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되고 기업은 경영실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입법예고 된 농협법 개정안을 살펴보면 정당하고 합법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된 협동조합의 대표인 조합장이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펼칠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역할이 너무 미미해 존재감마저 없게 되는 내용이 담긴 듯해 몹시 유감스럽다.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이 실질적인 권한이 없어 자신의 정책철학과 소신을 펼칠 수 없다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투표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조합에 따라 적게는 수백명부터 수천명의 조합원이 선택한 직접 선거의 의미가 퇴색되어선 곤란하다. 조합장이라는 직책이 갖는 ‘대표성’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상임이사제도의 전격 도입은 조합 퇴직자나 퇴직이 임박한 직원에 대한 구제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실제 상임이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사례를 보면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퇴직자나 퇴직 임박자를 상임이사로 영입하면 경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조합 외부환경의 변화, 즉 농업 및 유통환경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경영혁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조합 내부에서 인품과 학식이 높고 경륜을 갖춘 소장파 직원을 상임이사로 하기에도 좀 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남아 있는 잔여 근무기한과 4년의 상임이사 임기를 비교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상임이사로 외부인사를 영입하면 장시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의 업무는 비교적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공화국을 운영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 장시간 공부하고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이념과 경영이 조화돼야 하는 조직 특성을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가 시현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농협법 개정안 내용 중 상임이사제도와 관련한 사항은 자산규모 1천500억원 이상 조합을 포함해 모든 조합들이 스스로 제도 도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조합장의 경영능력, 전횡, 선거과열 등을 방지하기 위해 농협법을 개정한다는 취지는 수긍이 가는 점도 있지만 그 방법에 있어 상임이사제도 도입이 유일한 것이라는 논리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