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영양실조로 발을 질질 끌면서도 연구소에 나와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 죽지 않기 위해 곡식을 먹고 싶다는 유혹과 귀중한 식량종자를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 사이에서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그러나 과학자들은 종자은행을 끝까지 지키면서 차라리 죽음의 길을 택했다. 단 한 톨의 씨앗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축산과학원 전 직원은 AI가 발생한 작년 12월 31일 집을 나온 후 오늘까지 퇴근을 안 한다. 아기엄마도 있고, 결혼을 앞둔 젊은이도 있다. 오늘까지 45일째다. 종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행동이다. 축산인으로서의 소명감이 있고 DNA 말단에 연구원으로서의 기질이 조금이라도 내재돼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한다. 이번 AI는 충남 천안시 풍세면에 있는 종오리농장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연말인 12월 29일 발생신고가 있고나서 이틀 후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PAI)로 확진됐다. 이후 오늘까지 AI는 5개 도, 16개 시·군을 휩쓸었다. 경기도는 안성 이천 파주 양주 평택 동두천, 충남은 천안 아산, 전북은 익산 고창, 전남은 영암 나주 화순 장흥 여수 보성, 경북은 성주가 피해를 입었다. 그 와중에 매몰된 숫자는 550만수를 육박한다. 끔찍한 일이다. 정월대보름 밤 마른 들판에 들불이 놓이듯 그렇게 AI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눈여겨 볼 게 있다. 오늘까지 AI신고건수는 88건이고 고병원성 확진건수 43건인데 신고건수의 73%, 발생건수의 70%가 오리란 점이다. 종축만을 따져도 육용종계 2건 산란종계 1건에 비해 종오리가 9건이다. 원래 숫자가 많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닭사육수 약 1억5천수에 비해 오리는 8.7%인 1천3백만수다. 종자관련 통계를 봐도 닭이 종계장 370개소 부화장 163개소로 총 533개소인데 비해 오리는 종오리 농장 103개소 부화장 63개소 총 166개소로서 닭의 1/3 정도이다. 잘 알다시피 AI는 발생농가 혼자의 일로 끝나지 않고 주변에 엄청난 피해를 유발하는 질병이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미운 오리새끼’와는 전혀 다른 이 문제에 대해서 오리산업에 몸담고 있는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 서옥석 과장 (국립축산과학원 가금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