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양돈 시스템을 돌아보는 한 수의사의 사고실험

  • 등록 2026.04.15 12:5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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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현 교수(호서대 동물보건복지학과)

[축산신문]

 

오늘은 조금 불편한 상상을 함께 해보려 한다. 필자가 현장 수의사로 20년 넘게 일하면서 직접 목격해온 장면들이다. 이 글은 농가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잠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는 초대다.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 자체가 이 글의 시작점일 것이다.

 

만약 내가 돼지로 태어났다면… 그 첫 장면을 상상해본다.
내 아버지의 이름은 없다. 번호만 있다. 3260-0471. 냉동 보관된 정액 스트로에 찍힌 숫자. 아버지는 나를 본 적이 없고, 나도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연결된 방식은 오직 그 번호뿐이다. 유전 형질의 균일성과 생산 효율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나는 물론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스톨(stall) 안에 있다. 가로 60센티미터, 세로 220센티미터. 돌아설 수 없다. 임신 기간 내내, 그리고 그 전에도,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서 있거나 누워 있었다. 이미 열 번의 분만을 치른 몸이다. 스톨은 돼지가 서로 물어뜯는 것을 막고, 사료와 의약품 투여를 개체별로 관리하기 위한 구조다. 그 합리성을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빛은 — 그 눈빛만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태어나 어머니 곁으로 기어가던 날,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우리를 핥아주지도, 꿀꿀대며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젖을 찾았고, 어머니는 젖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젖줄만 있었고, 온기는 없었다.
행동과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부른다. 반복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환경에 놓인 개체는 결국 반응 자체를 멈춘다. 어머니가 무정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시스템이 허락한 만큼만 어머니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설계한 것은 사람이었다 — 소비자도, 정책 입안자도, 그리고 생존을 위해 효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농가도.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났을 때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정확히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먼저 이빨이었다. 젖니 8개를 절치기구로 잘라냈다. 형제들이 서로 물어 상처를 내지 않도록, 어머니의 젖꼭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꼬리였다. 나중에 과밀 환경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 것을 막기 위한 사전 처치라고 했다. 마지막은 거세였다. 웅취(boar taint)가 고기의 품질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였다. 이 모든 처치는 현장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 농가가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처치를 하지 않으면 더 큰 피해가 생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취는 없었다. 그날, 형제 중 몇몇은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 이유 전 자돈 폐사율은 통계에 따라 10~15%를 넘기도 한다. 처치 자체보다, 마취 없는 처치가 가져오는 스트레스 누적이 문제라는 연구 결과들이 이미 존재한다. 비용과 인력의 문제다. 그리고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유(離乳)가 되자 나는 어머니와 분리됐다. 생후 21일 전후. EU 일부 국가들이 28일을 최소 기준으로 정한 것과 비교하면 짧다. 새로운 우리에는 약 30마리가 있었다. 서로 처음 보는 사이. 돼지는 낯선 개체가 섞이면 반드시 서열을 정한다. 물고, 밀고, 쫓는다. 나는 작았다. 서열은 아래였다.
사료가 나오면 짱이 먼저 먹는다. 나 같은 아이들은 기다린다. 배가 고프면 더 예민해지고, 더 예민해지면 더 싸운다. 꼬리를 무는 행동이 시작되는 것도 그즈음이다. 꼬리는 이미 잘려 있었지만, 잘린 자리를 또 문다. 피가 나면 더 문다. 과밀이 낳은 폭력은 과밀 속에서 스스로를 먹어간다. 꼬리를 자른 것은 이 폭력을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폭력의 근본 원인인 과밀은 그대로다.

 

육성돈사로 옮겨진 날
나는 처음으로 합사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이유사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던 서열은 무의미해졌다. 새로운 우리, 새로운 무리. 낯선 냄새를 가진 아이들이 나를 향해 돌진했다. 싸움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이것이 육성돈사의 첫날이었다.
공간은 전보다 넓어졌다고 했다. 법으로 정해진 기준이 있다고 했다. 30킬로그램짜리 내 몸에 허락된 면적은 0.45제곱미터. 대략 욕실 한 귀퉁이 크기다. 그 안에서 나는 먹고 자고 싸고 싸웠다. 바닥은 콘크리트 슬랫이었다. 분뇨는 아래 피트로 떨어졌지만, 냄새는 떨어지지 않았다. 암모니아가 코를 찔렀다. 돼지의 코는 인간보다 훨씬 예민하다고 했다. 그 코로 나는 평생을 그 냄새 속에 살았다.
흙을 파보고 싶었다. 뿌리를 찾아 코를 땅에 박고 싶은 충동이 늘 있었다. 돼지는 원래 그런 동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슬랫 바닥에서 코를 박을 흙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옆에 있는 아이의 꼬리를 물었다. 잘린 자리였지만, 물었다. 심심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새벽부터 어수선했다.
잠에서 깬 건 소리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 쇠 문이 열리는 소리, 발소리. 평소와 달랐다. 돼지는 변화에 민감하다. 우리 모두 느꼈다.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차에 실렸다. 좁고 어두운 칸막이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그때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틈새로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나는 그 공기를 처음 마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바깥의 공기를. 폐 깊숙이 들어오는 그것은 — 달았다. 이렇게 단맛이 나는 것이 공기였다니. 암모니아도 분뇨도 사료도 아닌, 그냥 공기. 나는 그때까지 공기가 이런 것인지 몰랐다.
틈새로 바깥이 보였다. 파란 하늘이 있었다. 산이 있었다. 나무가 있었다. 나를 가두었던 축사는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두렵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차 안의 아이들 중 몇몇은 몸을 떨었다. 몇몇은 눈을 감았다. 몇몇은 나처럼 틈새로 바깥을 보았다. 체념한 것인지, 감상하는 것인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세 시간쯤 됐을까. 차가 멈췄다.
새로운 곳이었다. 처음 보는 아이들이 있었다. 또 합사였다. 또 서열 싸움이었다. 이번엔 지쳐서인지, 싸움도 예전만큼 격렬하지 않았다. 시원한 물을 마시기 위해 눈치싸움은 여전히 했다. 그것만큼은 어디서든 달라지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 나는 몰랐다. 계류장이라고 했다. 도축장 앞의 대기 공간이라고, 나중에 알게 됐다. 아니, 사실 알게 됐다는 표현은 틀렸다. 느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냄새가 달랐다. 소리가 달랐다. 앞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폭 50센티미터의 통로였다. 양옆은 막혀 있었다. 앞으로만 갈 수 있었다. 뒤돌아설 공간이 없었다. 돼지는 앞에 있는 것을 향해 걷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걸었다. 걷다 보면 어딘가에 닿겠지 싶었다.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을,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유사로, 어머니 곁으로, 태어나던 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통로의 끝에서 빛이 보였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국내에서 한 해 도축되는 돼지는 약 1천800만 마리다.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이 통로를 걸어갔다. 어미의 냄새를 기억하는 채로, 처음 마신 바깥 공기의 단맛을 기억하는 채로, 파란 하늘을 본 기억을 가진 채로.

 

사고실험은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생각의 통로를 조금 더 동물들에게 넓혀줄 수 있을까. 조금 더 일찍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해줄 수 있을까. 그 0.45제곱미터를 조금 더 넓혀줄 수 있을까. 그 변화가 가능하려면, 농가 혼자의 결단이 아니라 제도와 시장과 소비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대화를 지금 시작할 수 있다면, 이 글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다.

 

<본 내용은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로서, 축산신문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필자는 호서대학교 동물보건복지학과 교수이며, 농림축산검역본부·농림축산식품부 등에서 20년 이상 수의 공무원으로 재직하였습니다. 현장과 정책 양쪽을 경험한 시각에서 국내 동물복지 제도 개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축산신문, CHUKSA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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