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신문]
지난 주말 고3인 아들과 함께 영화 ‘오디세이’를 보았다. 스크린 속에서 트로이의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보며 문득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10년을 버텨낸 트로이의 성은 외부의 창칼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버티던 사람들이 스스로 문을 열어 위험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목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국 판단은 그것을 들이는 쪽으로 기울었다.
트로이를 무너뜨린 것은 그리스군의 창검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을 들일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정책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극장을 나서며 우리의 국경 가축검역과 국가 재난형 질병이 발생하는 방역현장을 떠올렸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구제역(FMD). 이 이름들이 해마다 뉴스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외부의 병원체가 국경을 뚫고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만이 문제일까. 어쩌면 우리도 트로이처럼, 위험을 걸러낼 인력(man power) 자체가 사라진 채 성문을 열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라지는 사람들
검역과 방역의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다. 그동안 검역·방역의 손과 발은 모두 수의사들이 맡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 손발이 되어야 할 젊은 수의사들이 도미노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민의힘 간사 김선교 의원이 2025년 10월 14일 농림축산식품부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시도별 가축방역관 현황자료(농식품부 제출, 2025년 6월 기준)에 따르면,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라 산출된 전국 가축방역관 적정인원은 1천657명이지만 부족 인원이 673명에 달해 적정인원의 60%밖에 충원되지 못했다. 부족률로 환산하면 40.6%에 이른다.
격무와 낮은 처우 앞에서 젊은 수의사들은 반려동물 임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사이에 낀 4050 검역·방역 수의사들은 늘어나는 업무량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버티고 있다. 조직의 허리가 되어야 할 세대가 정작 조직 전체의 무게를 떠받치는 기형적인 구조다.
임시방편으로는 미래를 지킬 수 없다
정부도 이 공백을 손 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지난 7월 23일 농림축산식품부는 가축전염병예방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골자는 두 가지다. 방역·축산물 위생 업무를 담당하다 퇴직한 수의사 공무원을 가축방역관으로 위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가축방역사 위촉 자격에 동물보건사를 추가하는 내용이다.
이 중 퇴직 수의사 공무원 위촉은 이미 여러 지자체에서 시도되어 온 방식이다. 경기·강원·전북·경남·전남 등에서는 인사혁신처의 ‘퇴직공무원 사회공헌사업’을 통해 평균 25년 이상의 현장 경험을 가진 은퇴 수의직 공무원들을 다시 불러들여 시료 채취와 임상 예찰, 소독시설 점검을 맡겨왔다. 이번 개정은 그 대응에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당장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방식에 박수만 보낼 수는 없었다. 은퇴한 선배들을 다시 현장으로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윗돌을 빼서 아랫돌을 막는 일이다. 지금 당장의 공백은 메울 수 있어도, 그것이 국경 검역과 방역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은퇴 인력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리고 완전히 현장을 떠난다. 이 흐름을 계속 반복한다면 우리는 매번 같은 공백을 다른 얼굴로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임시방편이 아닌, 국경 검역과 방역의 허리를 장기적으로 채울 수 있는 인력은 누구인가.
답은 동물보건사의 전문성에 있다
필자는 그 답이 동물보건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개정안이 가축방역사 위촉 자격에 동물보건사를 추가한 것은, 그래서 단순한 인력 보충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2025년까지 동물보건사 자격시험 최종 합격자는 3천738명이며, 2026년 제5회 시험 합격자를 더하면 4천 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산된다. 은퇴 인력처럼 소진되는 자원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공급되고 축적될 수 있는 인력이라는 뜻이다. 국경방역의 허리를 장기적으로 떠받칠 잠재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현재 상태 그대로는 곤란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한국동물보건사대학교육협회(동교협) 박영재 회장은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현재 동물보건사 교육과정에는 농장동물 실습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했다.
소도, 돼지도, 닭도 제대로 다뤄본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가축방역 업무를 맡기려면, 관련 실습과 인수공통감염병·공중보건 교육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있는 우려다.
그러나 이 우려는 문을 늦게 여는 이유가 아니라, 문을 열면서 반드시 함께 해야 할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필자는 읽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정안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동물보건사의 전문성을 산업동물·공중보건 영역까지 끌어올리는 투자다.
현재의 동물보건사 교육이 주로 개와 고양이 등 반려동물 진료 보조에 맞춰져 있다면, 앞으로는 인수공통감염병과 공중보건, 축산 현장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와 실습을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이번 개정안이 은퇴 인력의 빈자리를 잠시 메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물보건사가 국경방역의 상시적인 축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유명무실에서 벗어나는 길
여기서 잠시, 왜 동물보건사가 ‘유명무실’이라는 표현까지 듣게 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격증은 있으나 그에 걸맞은 역할과 권한이 뒤따르지 않는 것, 그것이 유명무실이다.
얼마 전 동물보건사 인증과 관련해 한국동물보건사대학교육협회 회의에 정부와 마주 앉은 자리가 있었다. 정부 측에서는 사무관급이 참석했다.
제도 안착을 위한 앞으로의 대책을 물었지만, 책임있는 답변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에서 답답함이 밀려왔다.
동물보건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길은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처럼 멀고 험해 보인다. 방향은 뚜렷하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투자와 뒷받침은 여전히 더디다.
트로이의 목마를 다시 생각하며
결국 트로이의 교훈은 단순히 문을 여느냐, 닫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을 열었다면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도 성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를 끝까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은퇴 수의사의 재투입은 지금의 공백을 메우는 응급조치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방역의 미래 설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짜 미래는, 지금 자격증만 손에 쥔 채 활동 영역을 찾지 못하고 있는 4천여 명에 이르는 동물보건사를 실력있는 전문인력으로 키워내는 데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당부하고 싶다. 자격 요건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끝내지 말아 달라. 그 이름에 걸맞은 교육과 실습,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설계해 달라. 이름만 빌려주고 실체를 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또다시 유명무실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성문을 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는지 바라보는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을 오래도록 지킬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필자는 그것이 동물보건사 자격증 제도가 레일 위에 올려놓을 방법 중에 하나이며, 동시에 우리 국경방역과 동물의료 체계가 온전히 서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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