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축산시험장장으로 발령 받을 때에도 뜻밖의 제의였다. 내가 초지사료과장으로 근무하던 1992년 10월 15일에 간부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니 고김정용 축산국장(차관보, 차관 역임)께서 부르시더니 “축산시험장장 자리가 비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승진을 시켜 준다면 국립종축장으로 가고 싶다고 답변을 드리니 이에 축산국장께서 알았다고 하시고는 그후 일체 이야기도 없으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그 일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13일경에 농림부 출입기자들을 위해 경기도 이천의 고기 집에서 연말 망년회를 하는 자리가 있었고, 술잔이 몇 잔 돌아 가는 중에 기자 한사람이 이인형 과장의 승진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고 김현욱 장관에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김한곤 차관께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을 듣게 됐다. 그날 이후에도 나는 일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12월 15일에 축산국장께서 부르더니 자기의 신상문제이며 승진문제인데 그렇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느냐고 말씀하시면서 12월 말경에 축산시험장장으로 발령이 나도록 결정됐으니 부임해 최선을 다 하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농촌진흥청과 축산시험장의 여건상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더 하라는 말인가? 하는 푸념들이 많은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우르과이라운드(UR)협상 중이고 협상이 끝나면 개방이 될 품목이 많아 사전준비를 해야 하는데 정책에 응용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적어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때였다. 특히 농림부에서 처음으로 과장이 연구기관장으로 승진을 해 가는 경우이니 농림부나 농촌진흥청이나 생각은 다르지만 나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였다. 농림부에서는 연구체제의 개선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주문하는가 하면 농촌진흥청의 분위기는 반기는 분위기가 될 수가 없었다. 국립종축장, 농림부를 거쳐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에서 국가의 중견공무원으로서 또 다시 험난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게 됐다. 처음에 축산시험장에서 어떠한 일을 해 보려고 하면 그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부터 듣기 시작했으나 작은 일부터 개선해 나갔다. 예를 들자면 축산시험장에서는 예산이 적다고 해 장장과 과장 그리고 연구결과를 학회에서 발표하는 사람만 제한적으로 출장 하던 것을 모든 연구원들의 출장자유화로 개선하는가 하면, 해외연구를 접한 연구원이 46%에 불과해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에 방향을 설정하고 모든 연구원이 외국을 다녀오기 전에는 나는 외국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3월 월례조회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물론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겼다. 이렇게 해 시험연구사업의 프로젝트화를 전제로 한 사업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하루에 담배를 4갑이나 피워야 하는 고뇌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됐다. 하지만 나에게는 공직자로서 명예롭게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진 영광의 시간이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내가 30대 초반에 연구관 승진에서 탈락했을 때에 고민 하는 것을 본 어머니께서는 “너는 36살이 돼야 연구관으로 승진이 되고, 43살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며 48살에 죽을 고비를 피할 수 없게 되는데, 그 고비를 넘긴다 해도 회갑이전인 58살에 세상을 작별할 수 있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그 고비만 넘기면 수명을 편안하게 다 보낼 것”이라고 몇 번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예언이 모두 맞았다. 36살에 연구관, 43살에 과장, 48살에 교통사고, 그리고 58살에 축산시험장과 국립종축장 시절 합병에 의한 건강 악화로 어려운 고비를 맞아 약 4년간을 고생 끝에 몸이 회복돼 오늘까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