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 국립종축장의 연구관에서 농림부 축산국의 낙농과 초지계장으로 발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으니 모든 것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사령장을 받으러가 H과장에게 인사를 드리니 “이 계장 무슨 일이 있어서 왔느냐”는 물음에 나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발령이 난 것을 박효작 총무과장과 장덕희 차관 이외는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그 때의 사정이었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살기위해 또 내 앞에 닥친 시련을 버티고, 견디면서 극복해야지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다음 날 출근 첫날부터 느껴지는 사무실의 온도는 섭씨 영하 25도보다 낮은 대관령의 한겨울 날씨 같았다. 농림부로 전출을 와서 축산국의 각과를 돌면서 “초지계장으로 발령을 받은 이인형입니다”라며 인시를 하고 다니는데 반갑게 인사를 받는 사람은 없는 것같고 냉랭한 기운만 감도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축산국내에서도 인사가 적체돼 나이가 많고, 승진을 할 사람들이 많은데 얼굴이 구리 빛으로 시커멓게 탄 시골 놈이 와서 서성대니 분위기가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농림부 근무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서류에 내 서명을 해 과장에게 결재서류를 올린 것은 첫 출근을 한 다음날인가? 며칠이 지난 후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하여튼 그 서류는 공중에 날리고 말았다. 기안도 할 줄 모르면서 직원이 기안을 해주면 그대로 결재를 올리지 않고 이렇게 수정을 해서 직원만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축산시험장과 국립종축장에서 연구를 한다, 현장관리를 한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뛰어 다니던 촌놈이 무슨 행정수완이 있겠으며, 올바른 정책개발은 물론이고 공문을 바르게 기안할 줄을 알겠는가? 그러나 기안을 한 서류를 계장이 고쳤다고 과장에게 고자질을 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안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장의 많은 독려와 구박 속에서 많은 일을 배웠다. 특히 만만치 않은 세상에 눈을 감고 길을 지나다가 잘못하면 코도 베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오늘까지 살아남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나는 독한 놈이다” “나는 살아야한다” “국립종축장의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놈이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독기를 품었다. 출근은 제일 먼저, 퇴근은 제일 늦게 했으며, 또한 타자수이던, 주사보이던 간에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먼저 인사를 하며 지냈다. 자칫 왜 그렇게 바보짓을 했느냐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 국립종축장으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별 수가 없지 않은가? 차관께서 이인형이는 견뎌 낼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초지계장으로 발령을 내라고 하셨다는데 우선은 견뎌 내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배도 고프고,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있으려니 참기가 힘들어서 오후 4시경에 청사 2층 별관에 있는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 왔는데, 국립종축장 유남열 대가축과장(농림부 낙농과장, 축협중앙회 이사 역임)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나에게 묻는 말씀이 어디를 다녀오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30분은 기다렸는데 보아하니 업무관계로 다녀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하시면서 계속 묻는 것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