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립종축장에서 농림부로 1977년 10월 1일자로 전출을 와서도 능력의 한계 때문인지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내왔다. 4년차가 되던 1980년에 축산물가공이용과장으로 승진이 되자마자 어떻게 할 수없는 4각(四角)의 진퇴양란(進退兩亂)이라는 장벽을 맞이하게 됐다. 그 때의 상황을 요약하면 197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제3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로 소 값이 떨어지는 파동이 지나고 1980년 후반기부터는 소 값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으니 1980년 말이나 1981년 초에 쇠고기 수입을 다시 시작 했어야 했다. 그러나 1981년 4월에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있어 농림부 장관은 소 값이 상승해도 쇠고기는 수입을 하지 않는다고 그 해 1월경에 발표를 하고 H 장관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하기 위해 떠나고 고건장관(국무총리역임)이 3월 10일에 부임하게 됐다. 그런데 소 값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계속해 오르기만 하니 어찌하겠는가? 그 전해인가는 폴란드로 기억하는데 쇠고기 공급이 부족해 폭동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시기이다. 그래서 할 수없이 관계부처 합의를 거쳐 외부에는 발표를 하지를 아니하고 쇠고기 수입을 발주하기 시작하게 됐다. 농림부 축산국장 방에는 쇠고기 수입을 하는 전담부서로 착각할 수 있는 상황판이 벽에 걸려 있었고, 그 현황판에는 쇠고기를 실은 배들이 항해하는 위치를 표시한 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입한 쇠고기가 도매시장에서 경매를 통해 식육업소에 배정되고 소비자에게 판매가 되는데 수입쇠고기가 한우고기로 둔갑해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발생을 하니 서민에게 값싸게 공급하기 위해 수입을 한 목적이 부정유통으로 물가안정에는 도움이 안 되고 부작용만 심하게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1981년 7월 말경에 과장이 참석하는 회의 자리는 아니었으나 축산국장을 대신해 내가 관계기관회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타 부처 참석자들이 농림부가 잘못해 이지경이 됐으니 농림부가 책임을 지고 대책을 세우라고 말하기에 나는 겁도 없이 농림부가 책임을 지고 추진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돌아와 장관께 보고를 드렸다. 그 후부터 내 인생에 승부를 건 두 번째 도박이 시작 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러한 책임을 져야하는 회의 결론이 예상돼 축산국장은 회의참석을 피하고 나더러 참석하라고 한 것이고 나는 분위기도 모른 채 참석해 덥석 대답을 하고 온 것이다. 그 날 회의 중에 나온 이야기 중에는 금년 쇠고기 문제는 어차피 해결이 불가능 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잘못하면 농림부의 과장부터 장관까지 신상(身上)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수도 있고, 다른 부처에 있는 우리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으니 농림부 단독으로 소 값 파동을 막고, 잘못되면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장관께 보고하는 과정에서 장관께서는 이 과장 자신이 있소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장관님 지금 자신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이제는 어차피 우리 농림부가 책임을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