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 나는 소처럼 순박해 가지고 문화 생활이 잘 갖추어진 화려한 도시로 떠나지도 못하고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발전이 없는 노후한 농촌에서 둥지를 틀게된 우리는 83년도에 남편이 제2회 영농 후계자로 선정되면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재래식 외양간이라 매일 같이 두엄을 퍼내고 경운기로 풀을 하나가득 베어 나르면서 후계자의 풋풋한 희망은 어미 소가 풀을 뜯는 평화로운 목장을 이루리라 기대했는데, 집집마다 육성우가 번창해 한우 파동이 일어나면서 100만원이나 가던 송아지가 85년도에는 10만원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사료값과 융자금으로 어깨가 무거워 지면서, 부푼 목장의 푸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열 마리도 넘었던 송아지 숫자가 이래저래 줄어들었다. 그 반면에 낙농업을 하는 이웃집은 매일같이 집유차가 신나게 우유를 실어가며 보름에 한번씩 나오는 유대가 얼마라고 할 때 우리도 젖소나 키울걸 하는 부러움에 더욱더 속이 상하고 한우에 대한 희망은 멀어져 갔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부에서 83년도 후계자 융자금을 연기 시켜주는 바람에 큰 타격은 모면했지만 굴곡이 심한 한우는 언제 또 파동이 일어날지 몰라 그 불안감에 몇 년을 버텨오다가 의논 끝에 90년도에 얼룩 송아지로 바꿔 낙농업을 시작하였다. 환경 위생 문제로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다 개방식 톱밥 우사를 한동 짓고 송아지가 크면서 운동장과 착유실을 또 한동지어 만삭우 20두를 들여왔다. 복잡한 기계시설은 현대식이라 생각보다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고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한 마리 두 마리 연이어 송아지를 낳아 ㅇㅇ우유회사와 계약을 맺어 납유에 들어갔다. 그동안 담넘어로 보아오던 남의 낙농업은 늘 수월한 줄만 알았다. 우리는 낙농을 시작하기 전만해도 아침 일곱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하지만 낙농을 하고부터는 새벽 5시가 좀 넘으면 일어나 투덕 투덕 입고 쓰고 축사로 향해야 했다. 그도 헌 자동차가 시동이라도 안 걸리는 날은 눈보라 치는 캄캄한 새벽길을 터벅터벅 10분을 걸어야 했다. 어설픈 기계작동과 서투른 착유 솜씨에다 소들은 초산이라 발길질이 너무 난폭하여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뒷다리는 밧줄로 묶어 놓고 허리는 고정틀로 채우고 남편이 소 유방을 닦으려면 난폭한 소발길질은 수없이 올라와 남편의 팔과 무릎을 걷어찼다. 또 배설물에 푹 젖은 소의 꼬리가 남편의 얼굴을 이리 저리 훔쳐 갈기면 남편의 거세지기 시작하는 목소리의 톤은 수직선으로 튀어 올라 연발하여 내게로 날아 왔다. 가슴은 두근 서근 두손은 사시나무가 된채 보조 역할도 제대로 못한다고 온갖 설움 다 받아도 그 상황에서는 나는 끓어 오르는 감정을 바보처럼 자제를 해야했다. 한 손으로는 소의 꼬리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물수건을 대기시키며 있는 힘을 다해 소의 엉덩이를 밀어가며 한 마리씩 서투른 착유를 하는 광경은 소와 씨름을 하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렇게 열 댓마리의 착유시간은 두시간이 넘게 걸렸다. 시리던 손은 아리다 못해 나중에는 아무 감각도 못 느끼고 뒷정리를 하고 나면 아침도 아홉시, 저녁도 아홉시다. 서로가 퉁퉁 부은 얼굴로 원망이 가득찬채 집에 들어가면 때가 훨씬 지났어도 밥맛은 뚝 떨어지고 찬바람이 휭 도는 분위기다. 지치고 후지근한 몸은 씻기도 귀찮을 정도며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 새벽에 그놈의 소들 젖을 어떻게 또 짜야하나 하는 걱정에 뒤척거리다 늦잠에 단잠을 자다보면 어느새 새벽 5시라고 자명종이 울린다. 반쯤 감긴 눈을 비벼가며 궁시렁하다보면 삼십분이 훌렁 지난다. 조금만 더 늑장을 부리고 싶어도 아침 여덟시면 집유차가 오기 때문에 몸이 천근 만근이 되어도 이끌고 축사로 향해야 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새벽5시 바람은 코끝이 얼얼하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늘의 별만이 반짝이는 시간에 캄캄하게 불이 꺼져 따뜻한 방에서 평화롭게 단잠을 자고 있는 이웃집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