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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낙농 이끌어온 믿음직한 맏형

서울우유 창립 65주년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2.07.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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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세기 이상 한국낙농산업을 리드해오고 현재도 어려운 낙농환경을 개척자정신으로 이끌고 있는 서울우유협동조합. 지난 11일자로 65주년을 맞이했다.
특히 올해 1일 1천만개의 우유 판매를 돌파하는 등 국민의 식생활개선과 체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서울우유는 우유·유제품 완전개방시대에서 한국우유산업을 대표하여 최고의 유제품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서울우유는 1937년 7월 11일 창립된 경성우유동업조합이 모체이다. 경성우유동업조합은 한민족이 해방되던 해인 1945년 9월 2일 서울우유동업조합으로 개칭되었고 오늘의 서울우유협동조합은 1962년 1월23일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부터이다.
1962년 1백14명였던 납유조합원은 1980년 4천1백67명으로 늘고 1990년 6천9백15명으로 조합원 가입이 최고에 달했다가 1996년 4천9백46명·2001년 9월 3천9백3명·6월 현재 3천6백82명으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조합원은 전국 낙농가 1만2천5백명 대비 29.4%를 점유하고 있다. 납유조합원 3천3백4명이 사육중인 젖소는 15만7천2백89두로 전국대비 28.6%를 점유하고 있다.
1962년 30명였던 서울우유 직원수는 1980년 1천3백89명으로 늘고 1994년 1천9백5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이후 매년 소폭씩 감원, 7월 현재 서울우유 직원은 7월 1천8백3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국내 우유·유제품 업계의 맏형인 서울우유의 지난 4반세기간 우유와 유제품 판매신장량은 가히 괄목할만하다.
특히 우유는 2백ml를 기준, 지난 1975년 1일평균 81만3천개에 불과했던 것이 85년 2백4만9천개·95년 5백45만2천개·2001년 7백66만7천5백개로 꾸준히 늘고 올 들어서는 5월 24일 1천만개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 서울우유의 효자 품목인 액상요구르트는 첫 출시했던 1978년 5만7천개였던 1일평균 판매량이 90년 82만4천개·2001년 1백21만4천5백개로 증가했다.
호상요구르트도 첫 출시했던 1990년 6만개였던 1일평균 판매량은 2001년 11만7천개로 증가했다. 이외 2001년 기준 1일평균 판매량은 ▲다요트80=3만6천9백개 ▲앙팡=31만6천4백개 ▲짜요짜요=1백ml환산 7만1천개 ▲드링크=4만2천5백개 ▲칸21=15만7천8백개 ▲드링크계=1백50ml환산 18만6천1백개 ▲아침의 주스=9백50ml환산 4만8천5백개가 판매되었다.
따라서 1962년 2천6백만원에 불과했던 연간 매출액은 ▲80년=5백95억8천8백만원 ▲90년=2천7백19억8천5백만원 ▲2001년=8천9백25억원으로 매년 큰폭으로 증가, 빠르면 2003년 늦어도 2004년 매출액은 1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관계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농축산물이 전면개방이 되어 유제품과 유사유제품의 수입량이 매년 급증하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경영하는 목장부지가 도시화에 점점 밀려나는 등 국내·외적으로 당면한 낙농현안과제가 산적하여 이 난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서울우유로서의 고민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8.15해방과 6.25동란등 민족의 역사를 지켜본 서울우유. 50년대 구호분유사건, 60년대 최초의 조제분유 생산과 분유소분 파동, 70년대 우유내 대장균 파동과 수유파동, 80년대 원유생산조절(안) 반대시위로 당시 농림수산부가 철회, 90년대 고름우유사건과 농축산물완전개방에 따른 대외 경쟁력 강화 등 오늘날 한국낙농이 산업으로 우뚝 서도록 하는데 서울우유가 슬기롭고 능동적으로 대처한 역할은 아주 지대하다. 그런 만큼 21세기 국제화·개방화 역사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 서울우유의 역할과 거는 기대는 자못 큰 것이다. <조용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