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총장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다소 고민을 해야 했다. 대학총장이 목장을 한다는 사실이 훌륭한 인터뷰대상이었지만 축산학계의 대표적 학자, 더욱이 근엄한 모습이 떠오르는 국립대총장에게 짧은 지식으로 축산에 관한 얘기를 묻고 정리한다는게 다소 부담이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한 처지니 어쩌랴. 박총장을 만난건 지난해 11월 28일. 학교행사와 외부일정등으로 바쁘니 아침시간이 좋겠다고 하는 바람에 진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전 8시 30분에 경남 산청의 박총장집을 찾았다. 초행길이었지만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주에서 새로 뚫린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일부구간만 개통)에 차를 얹어 30분쯤 달리다 단성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신안면사무소 앞에서 행인들에게 “박총장댁이 어디냐”고 묻자 단번에 해결됐다.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 감싸안는 곳에 자리한 박총장집을 들어서자 방금 아침식사를 마친 듯 온집안이 토종된장으로 끓인 찌개 냄새가 진동했다. 거실 한켠의 책상위에 구식 데스크탑 PC와 신형노트북이 놓여 있긴 했으나 퀴퀴하면서도 구수한 된장냄새 가득한 실내분위기와 작업복바지에 남방하나 걸친 소탈한 모습의 박총장 인상이 총장댁이라기 보다 평범한 축산농가 같아 보였다. 모과차를 사이에 둔채 시작된 인터뷰는 박총장의 겸손 때문에 싱겁게 진행됐다. 기자는 “목장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고...”라는 박총장의 말에 “볼일이 있고 없고의 판단은 일단 기자의 몫”이라고 응수하려다 김이 빠질까봐 그만두었다. 대신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교수로서 그리고 지금은 대학이라는 거대조직을 이끌어가는 총장으로서 목장을 한다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물었더니 박총장은 “공부를 할려다 보니 목장을 하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박총장이 목장을 갖게 된 사연속에는 지금은 먼곳의 얘기로 들리겠지만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그시절 일반국민들의 고단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경상대를 졸업한후 조교로 모교에 적(올해 쉰아홉인 박총장은 경상대에 입학한이후 지금까지 36년간을 모교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을 두고 있던 박총장은 서울대에서 박사과정을 공부(번식학)하면서 항상 실험·실습에 목이 말랐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실험은 돈이 수반되기에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아 학위공부를 하면서 직접 실험·실습을 하기 위한 목장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만해도 연구비를 지원받아 실험을 한다는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것이다. 박총장은 송아지 3마리로 시작한 목장을 실험실삼아 박사학위를 취득한후 본격적인 교수생활을 하며 마리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물론 시행착오가 따랐다. 박총장의 말. “말도 마세요. 목장을 하면서 이론과 실제가 많다는걸 절감했지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인근농민들에게 겨울철 담근먹이로 엔시레이지를 권장하고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글쎄 다 썩었다고 선생도 못믿겠다고 항의하는거예요. 현장에 가봤 더니 비닐위에 덮은 흙 두께가 10㎝밖에 안되지 뭐예요. 저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두껍게 덮으라고만 했지 몇센치 두께로 흙을 덮으라고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한동안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저도 낙농가가 된것이죠.”박총장은 이때의 경험 때문에 학생들에게 유난히 실험·실습을 강조한다. 평교수시절엔 학생들을 자신의 목장에서 실습을 하도록 했고 총장이 된 지금은 아예 교과과정에 실습시간을 못박아 실습을 적당히 때우는걸 막고 있다. 실습이 없는 교육은 알맹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박총장은 “특히 축산분야 학문의 경우 현장실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말했다. “덴마크의 경우 돼지를 사육하려는 농민은 정부가 정한 기준에 맞는 토지를 보유해야함은 물론이고 3년간 의무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육과정의 절반은 현장실습이며 또 이수학점의 절반은 실습농가가 줍니다.” 박총장의 고생담은 낙농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채 목장을 시작한 낙농가들의 전형적인 고생담과 같다. 박총장은 착유를 시작한 1976년부터 4년간을 직접 우유통을 들고 진주시내까지 우유를 날라야 했다. 교통편이래야 시외버스가 유일해 버스차장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는 것. 박총장은 현재 68두(33두착유)의 젖소를 기르고 있는데 1일 납유량은 평균 8백㎏쯤 된다. 직접 관리를 하지 못해 성적이 중간쯤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총장은 평일엔 밤이나 이른 아침, 그리고 휴일날 젖소상태를 일일이 체크, 관리인들에게 작업지시를 내리고 개체별 기록을 하고 있다. 박총장은 “축산은 할수록 어렵고 고민없이 되지도 않는다”며 적당히 놀면서 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고통없이는 성과도 없다는 것이다. “협동조합과 같은 생산자단체가 튼튼해야만 축산이 안정된다”고 믿는 박총장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던 민간유업체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25년간을 부산우유조합에만 납유하고 있다. 박총장은 낙농을 하는 사람에겐 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땅이 있어야만 가축분뇨를 적절히 처리할수 있고 조사료를 생산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총장에겐 땅이 꽤 있다. “조사료를 생산하기 위해 값싼 땅을 사는데 주력하다 보니 나중엔 동네사람들이 이사를 가면서 집터와 텃밭까지 사라고 하는 거예요. 난색을 표하면 다른 사람이 사면 살림집을 짓게돼 냄사나는 목장을 못하게 될수도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겁을 주는 겁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목장주위의 자투리땅을 사게 됐는데 활용못하는 경우가 많아요”박총장에겐 6만평짜리 야산도 있다. 초지를 조성하기 위해 논 3마지기값을 주고 샀는데 경사가 심해 밤나무를 심었다. 돈이 생기면 밭을 사거나 개간을 하고 그도 모자라 임차도 하는 바람에 박총장은 농사가 많다. 콩농사만도 8만평이나 된다. 바로 이 콩이 이른 아침 박총장 집에서 나는 된장냄새의 진원지다. 부인 최효자여사(57세)가 직접 담은 된장을 맛본 사람들의 권유로 아예 된장공장까지 차렸다. 콩농사를 짓는건 바로 이 때문이다. 장작불로 메주를 쑤어 황토숙성실 에서 발효시키는 전통방식으로 담근 이 된장은 부인의 이름을 딴 ‘산음골 효자된장’이란 브랜드로 농협매장을 통해 팔리고 있다. 목장에서 나온 분뇨가 밭으로 환원되어 콩과 조사료가 생산되고 밤나무밭에서 나오는 장작(오래된 나무를 갱신하기 때문)으로 메주를 쑤는 박총장의 농장운영은 전혀 다른 요소끼리 결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상경하는 길에 항상 공부하며 남을 가르치는 학자로서, 그것도 대학총장이 되었음에도 자연을 벗삼아 농사를 짓는 박총장의 여유로움은 ‘고통속에서 일궈낸 성과’라는 생각을 해봤다. 물론 다음 기회에 다시 방문할수 있는 적당한 핑계 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박총장댁의 토종된장찌개를 맛봐야 하겠다는 ‘음흉’한 계산도 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