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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을 떠나면서

홍완표 신일화학회장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3.11.10 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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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강남, 아니 서초구를 떠날 이사 준비로 분주하고 정신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회사의 직원들 역시 바쁘게 움직이며 땀을 흘린다. 1995년 이곳으로 사무실을 옮긴 이후 9년 가까이 정붙이고 살았던 터전이다. 사무실 주변의 네 군데 지하철역(서초, 방배, 사당, 총신대역)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오르내리면서 내 나름대로는 정이 꽤나 들었다.
단골로 다니던 식당을 어림짐작으로 헤아려보니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왕래하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고, 때로는 밤늦은 시간에 끼니 신세를 지기도 했던 터라 도망치듯 슬그머니 내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떡 돌리듯 하루에 여러 집을 찾아다닐 형편도 아니어서 인사를 다니는 일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이래저래 10월은 월초부터 인사를 다니느라고 바빴다.
최근 강남구 대치동이 부동산 투기의 대명사처럼 뉴스에 자주 거론되었다. 서초구는 뉴스에 자주 등장될 정도의 스타는 못 되지만, 명소가 많은 곳이다. 예술의 전당이 있는 우면산,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질서를 바르게 잡아주는 최고의 효시인 대법원이 있고, 그 앞에는 꽃동네가 있다. 꽃동네라고 하면 누구나 비닐 하우스를 먼저 떠올리면서 얼굴부터 찡그릴 수도 있다. 잡초가 우거진 밭과 쓰레기 더미, 분간조차 어려운 망측한 냄새, 잡동사니를 태우는 매운 연기, 쇠스랑과 낫, 그리고 이곳저곳에 나뒹구는 폐타이어를 연상한다. 그러나 지금의 꽃동네는 깔끔하게 치장되어 그야말로 걷기에도 기분 좋은 거리가 되었다. 곱게 단장한 시골처녀의 향내와 신식 모델의 날렵한 이미지를 함께 아우르고 있는 듯 하다.
나는 회사를 시작한 이후로 4번째 이사를 한다. 23년 전 회사를 시작할 때는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여러 곳을 찾아 헤매다 합정동의 허름하고 쌈직한 반 지하실을 얻었다. 이곳에 사무실을 정한 것은 당시의 공장이 김포에 있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1982년 여름 장마로 한강의 제방이 넘친다고 아우성을 쳤을 때의 다급했던 상황을 머리에 떠올리면 지금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폭우로 거리에 넘쳐나던 물이 급기야는 사무실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급히 건져야 할 것은 사무기구보다 서류뭉치들이었다. 하는 수 없어 주인집의 2층으로 급히 옮기었다. 뜀박질하듯 지하실에서 2층을 오르내리느라 엄청나게 진땀을 흘렸다. 이후 두세 달을 등허리가 시큰거려 애를 먹은 기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0 여 년의 세월을 지나쳤다.
물난리를 겪으면서 고생을 하고 나니, 값이 낮다고 해서 아무 곳이나 자리를 쉽게 터전을 잡을 일이 아니었다. 어영부영 그곳에서 3년을 살다가 다음으로 이사를 한 곳은 서교동의 언덕이었다. 그 일대에서는 제일 높은 곳이었던 때문이고, 이곳에서 다시 10여 년 가까이 살았다.
공장을 충청도로 이전 확장시키다 보니, 사무실 또한 고속도로 가까운 지역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공장을 오가는 시간이 길어져 힘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큰맘 먹고 아예 안양으로 이사를 가기로 용단을 내렸다. 서해안 도로를 이용하려면 안양이 최적지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무리를 한 셈이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니, 사무실을 이리저리 옮긴 것은 오로지 공장과의 교통거리, 즉 기능적인 편리성의 추구에만 매달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 보면 시류에는 너무 등한하여 맹하게만 살았다는 자괴지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내 젊었을 때 고양군 근처 서울 변두리에 살면서도 고양군이 일산 지역을 품에 안고 상전벽해가 되는 것을 전혀 몰랐다. 이곳 투기의 일 번지라고 하는 강남에서조차 10년 가까이 살면서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친구 중의 하나가 도곡동 파워팰리스에 들어가 부동산 급등으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얘기와 얼마 후 갈치조림과 소주 한 병을 얻어먹은 것이 전부이다.
이제 강남을 떠나려니 언제 다시 이곳에 발을 딛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누가 등을 밀어 내보내는 것은 아니련만, 못난이가 돼서 강남에서 밀려 나는 것만 같이 생각된다. 마치 추운 날씨에 오그라지듯 자꾸만 마음이 위축되는 심사를 어찌할까. 더구나 오늘은 강남의 비상대책이 발표된 날이라고 했다.
사십 여 명 직원들과 어떻게 해야 먹고 살아갈 지 궁리하면서 고심한지 30년이다. 나는 그래도 서울에 잠을 잘 수 있는 아파트가 있고, 경기도지만 사무실이 있고, 공장도 있어 나름대로는 중산층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다. 또한 참을성도 있고, 맹자의 항상과 항심도 갖고 있다고 자처하며 살았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신문을 볼 때마다 자신감이 없어진다. 두려움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머리가 무거워진다. 개방으로 맥없이 무너지는 농촌 경제, 카드 빚에 몰려 집단 자살하는 가족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 못 차리는 위정자들, 이러 모든 일들로 인하여 나는 힘이 빠진다.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으로 생존의 기로에 서서 방황하는 선량한 백성들은 어찌 할까나? 꿈을 제대로 실현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한 청년 미취업자, 팔팔한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난 실직자,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수입 농산물로 한 해 땀흘려 지은 농사를 갈아엎는 농민들, 매미태풍으로 집을 잃고 매서운 겨울을 맞이하는 사람들, 이루 열거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군상들이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다.
강남이여! 너 언제 머리 숙이고 속죄할 것인가? 부동산 투기의 대명사격인 강남,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강남을 떠나면서 나는 하염없는 공상에 빠져든다. 내게 정말로 신통한 힘이 있다면 강남을 내 어깨 위에 떠메고 함께 떠나고 싶다. 아니, 저 멀리 제주도 건너 바다 밖으로 힘껏 집어던지고 싶다.
금년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추우리라는 기상대의 예보가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못 견디게 추운 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으스스한 한파가 아니겠는가? 잘못된 한 사람의 위정자, 비리에 여념이 없는 공무원,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한 사람의 졸부, 그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과 비애가 이 땅위에 매섭고 추운 한파를 드리울 것인가? 먼 옛날, 조송 선생도 지금의 내 마음과 같아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으리라.
택국(澤國)의 강산이 전화에 휘말리니 / 澤國江山入戰圖(태국강산 입전도) 백성은 어이 나무하며 풀 베어 삶을 즐기리오 / 生民何計樂樵蘇(생민하계 낙초소) 그대에게 바라노니 제후에 봉하는 따윈 말도 말게 / 憑君莫話封侯事(빙군막화봉후사) 한 장수의 공 이루려면 수만 병사의 뼈 바랜다네 / 一將功成萬骨枯(일장공성 만골고)

*택국(澤國) : 소택(沼澤)이 많은 지역. 곧 황소가 도피했던 양쯔강 하류 지방.
*전도(戰圖) : 전쟁의 범위 안.
*초소(樵蘇) : 나무를 하고 풀을 벰. 나무꾼. 시골사람의 생업
-희종 기해(己亥)년에 만당(晩唐) 노시인 조송(曹松:생물년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