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제는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파탄되었고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들 만 늘어나고 있었다. 패전 후 남겨진 국토는 북해의 음습하고 시린 바닷바람이 휘젓는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 유틀랜드 반도 뿐, 거기서 자랄 수 있었던 유일한 작물은 호밀 뿐 이었다. 영하 25도에서도 싹을 틔우고 땅밑 3m 까지 뿌리 내리며 땅 위 1.5m 이상을 자란다는 호밀 껍질도 벗기지 않은 이 호밀로 만들어 색갈마저 검은 빵이 곤궁한 시대 덴마크 사람들이 의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먹거리 였다. 선구자 달가스(Dalgas) 등에 의해 불이 당겨진 국민교육과 황무지 개척운동의 성공으로 이제는 년간 국민소득 3만불과 세계 모범이 된 복지사회를 이룩한 오늘날에도 덴마크 사람들은 여왕에서부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검은 빵을 먹는다. 어느 집 식탁에도 흰 빵과 함께 검은 빵은 꼭 오르며 덴마크 사람이면 누구나 먼저 검은 빵을 먹는다. 검은 빵은 껄끄럽고 맛이 없다. 그러나 검은 빵을 싫어하는 어린 자식들에게도 부모들은 강제로 검은 빵을 먹게 한다. 그 어렵던 고난의 시절과 지도자 달가스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덴마크 못지않은 어려운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늙은 부모를 버려야만 했던 고려장(高麗葬)의 처절한 사연은 묵은 이야기이니 덮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겨우내 묵은 곡식은 다 먹어서 없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초근목피(艸根木皮)로 간신히 연명하던 춘궁기(春窮期) 보릿고개는 별로 오래 되지않은 우리들의 자화상 이다. 최근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육사 교장의 편지는 어렵던 그 시절을 다시 되 돌아 보게 한다. 1960년대 초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 소득은 170불, 태국은 220불 일 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특명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을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국민들이 생각나서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건너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선진국처럼 우유를 충분히 먹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열망 중의 하나이었던 박대통령은 방문일정이 끝날 무렵 한국 낙농발전에 선도역할을 할 시범목장 건립을 위한 지원을 뤼브케 대통령에 요청하였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농협중앙회 한독낙농시범목장 이었다. 안성군 관내 48만평의 부지만 한국 정부가 준비하고 건물과 기계장비 및 200여두의 고등등록 홀스타인 등은 모두 서독 정부가 원조하여 이 목장이 개설되었다. 목장 준공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낙농진흥은 그 당시 우리의 당면과제 이었다. 설립 후 이 목장은 한국낙농 태동기에 목장을 경영하거나 새롭게 목장을 개설하려는 이의 귀중한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고 목장장이나 전문 관리자로 활동한 수많은 핵심 낙농 요원들을 배출하였으며 목장에서 생산된 우수 혈통의 송아지는 인근 농가에 분양되어 낙농진흥의 소중한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목장은 축협중앙회로 이관되었다가 다시 농협중앙회로 돌아오는 동안 목장 명칭과 역할도 바뀌어 버렸고 목장의 내력을 알리는 준공 기념비 마저 목장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이제까지 우리 모두는 그 가난에서 벗어나 이만큼 달려왔다. 그러나 우리가 극복한 그 가난했던 시절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 보릿고개, 그 어렵고 처절하던 시절을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줄 우리식의 검은 빵 이라도 개발해 보자. 한독목장 - 그 이름을 다시 사용할 수 없다면 목장 설립 사연을 후세에 전해 줄 기념비라도 잘 보전함이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만큼 발전한 우리 낙농 역량으로, 어렵던 시절에 우리가 독일로부터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이제 기아에 허덕이며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북한이나 개발도상국 어느 한곳에 낙농시범목장 하나쯤은 건립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