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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경영학회 '2010년 축산수급전망' 심포지엄 요약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4.07.09 21: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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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제 아무리 이지적인 사람일지라도 이성은 3푼이고 감정이 7푼이라 했다. 그러니 속세에 묻혀 사는 우리네 속인들의 경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조선시대 유학의 선비 정신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며 학처럼 고고하게 사는 군자(君子)를 으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상이요 겉으로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 슬프고, 억울하고, 혐오스런 감정을 속으로 감추어 두고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인간 본래의 내면은 칠정 즉 희노애락애오욕(七情, 喜怒哀樂愛惡慾)에 묶여있어 부글부글 끓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처럼 차갑게 변하기도 하는 등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배구조를 보라. 상사가 화를 내면 경비원 집의 개가 발길질에 걷어차인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자신의 감정을 감춘 채 태연한 척 가장하는 것은 절대 권력이나 부 앞에서 아부를 하며 자신의 부귀영화를 꾀하는 무리들의 경우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부를 할 필요가 없는 권세가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다보니 교만이 지나쳐 스스로 파멸에 이른다.
사람이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수가 없다면 그는 바로 신(神)이리라. 자신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때때로 너그러운 심성을 발휘하고는 한다. 여기서 말하는 너그러움이란 것도 실은 자기 자신의 반성과 사과의 마음이 뒤따를 때에 한한다. 논어 학이편에는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라는 말이 있다. 즉, 잘못이 있으면 변명하지 말고 반성할 것이며, 잘못됨의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온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탄핵정국의 실상도 실은 ‘사과를 했느냐, 변명을 했느냐’에서 비롯하지 않았는가? 이로 인해 국가발전의 중요한 시기인 50여일을 논쟁으로 지새우며 위태롭게 지나갔다.
옛날부터 사람은 세상살이에서 세 가지의 뿌리를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세 치 혀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입을 잘못 놀려 체신을 떨어뜨리고 많은 재산을 잃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까지 잃은 자가 부지기수이다.
하루를 지내노라면 많은 말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그들의 언행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다가 귀가를 했다. 속이 출출했던 나는 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한 국가 교장선생, 이 이상 평론가 선생, 금 무위 사장과 함께 자리를 했다. 도자기 술병에서 조 껍데기 술을 따라 토기 잔으로 마시다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모두 술이 얼큰하게 취했다. 오랜 시간,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열띤 논쟁과 논란을 거듭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 세상사를 논하고 이놈 저놈을 평하는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결국 핵심 주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 말은 곧 ‘사람이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것으로 귀착된다.
사람을 분석하고 또 분석해 본다. 결국 사람들은 없어지고 모두가 ‘자네와 나’, 즉 ‘너와 내’가 된다. 내 쪽에서 보면 나와 상대가 전부이고, 이는 상대 쪽에서 보아도 매 한가지이리라. 어느 사람을 기준으로 보아도 ‘나와 너’가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은 같다. ‘나와 너’에서 너를 빼면 오직 나만 남는다.
나를 한자로 표기하면 我(나아)이다. 아(我)는 ‘손수(手)’변에 ‘창과(戈)’자로 구성되어 있다. 손에 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왜 나는 손에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조상들 역시 예전에는 먹고사는 일, 즉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일이 유일한 삶의 목표이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고, 사나운 동물이나 이웃의 적(사람)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 항상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공격과 방어의 연속은 곧 싸움(전쟁)이다. 학자들은 인류의 시작이 1만2천년, 또는 8,9천 년을 주장하지만, 오랜 세월 그들은 사람이 아닌 동물로서 생존만을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문자가 쓰인 것은 불과 2천5백년에서 3천년 전이라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문자는 그 동안 무수한 변화를 거치면서 발전된 것이다. 문자가 쓰이기 시작한 때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형문자(文字)가 보편적이었다. 글자를 만든 원시조상들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손에 창을 든 모양을 형상화했다. 즉,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을 ‘나’ 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무기를 들고 너는 무엇을 들었느냐, 상대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무기를 들고 있으며, 무기를 든 자들의 대결은 자칫 주검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상생(相生)이라는 글자도 뒤를 이어 탄생된 것이다. 즉,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라 서로 살길을 모색하여 함께 생존하자는 것이 바로 상생(相生)이기 때문이다. 자아(自我)와 상생(相生)이라는 글자는 결국 아(我)가 나만의 글자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즉, 당신의 글자이기도 하고 당신의 무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관계맺음의 최고 경구인 이 말을 만들어내는 물꼬를 튼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