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김대중 국민정부가 그랬듯이 지금의 노무현 참여정부로 개혁을 내세우고 있으며 야당 또한 개혁을 외치고 있다. 개혁하면 고려말의 신돈, 조선조의 정암 조광조, 정조대왕, 흥선대원군, 고종이 떠오른다. 고려말 무단 정치와 원나라의 간섭기를 통하여 득세한 부패한 권력 세력에 대항하여 토지의 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잡기 위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한 신돈, 조선 건국 100년 후 어지러워진 사회를 바로잡고 개국 공신가문을 중심한 훈구세력의 특권과 비리를 척결하여 올바른 왕정을 실현코자한 조광조,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고 당쟁을 잠재우려 탕평책과 문예중흥으로 왕권의 탄탄한 기반을 모색한 정조, 외척 세도를 타파하고 파벌이나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역량있는 인재 등용과 서원 철폐와 구휼책을 실시한 흥선대원군, 단발령과 동도서기, 신사유람단을 구성 일본의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케하고 국왕의 뜻이라도 내각회의 의결을 거치게 한 고종을 가리켜 사학계에서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라고도 한다. 그럴진대 개혁이란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니다. 또한 개혁은 어느 특정인의 전유물일수도 없다. 박정희 공화당 정부는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산 현충사를 성역화하고, 칼잡은 손의 위치가 오른쪽이 맞느냐, 왼쪽이 맞느냐는 논쟁을 불러 일으킨 거대한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광화문 큰 거리에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무렵 수원 팔달산에는 강감찬 장군이 말타고 질주하는 모습의 거대한 조형물도 설치됐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 중에 당연히 포함돼야 할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5·16 군부에 의한 정부가 아니었어도 이순신 장군과 강감찬 장군의 조형물과 아산 현충사의 성역화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졌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도 개혁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으나 그 성과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을 남겼다. 노무현 ‘참여정부’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 김영삼 ‘문민정부’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개혁’하면 정암 조광조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수원 광교산을 넘어 수지로 가든가, 수지에서 수원 광교산 등산을 하려면 가까운 길가의 야산에 있는 정암 조광조의 묘소를 한번쯤 찾아 보았으면 한다. 묘소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개혁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을 정암 조광조의 모습이 담겨있는 심곡서원이 있다. 중종때의 문신으로 자는 효직, 호는 정암으로 본관은 한양이다. 1482년 무더운 여름 8월 조원강의 2남으로 태어나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케 했고 소격서 폐지를 단행케 했다. 대사헌에 올라 신진 유학자를 과감히 등용하여 문치를 하도록 하고 정국 공신의 훈공을 대폭 삭제하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의 반발을 샀다. 훈구파의 남곤, 심정등이 무고하여 전남 화순군 능주면(당시는 능주군)에 유배되었다가 1519년 삭풍이 몰아치는 12월,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사사되었다. 그 후 선조때 영의정에 추종되었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조광조의 묘와 그를 기리는 심곡서원은 수원 인근 용인시 수지면 상현리에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있을 당시에도 존속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서원 정판각에는 67종의 486개 책이 소장돼 있었으나 1985년 도난 당하여 현재는 ‘정안집’ 몇권만 남아 있다. 개혁의 상징인 조광조의 묘역과 심곡서원은 초라하기 이를데가 없다. 조광조의 최후는 비극적이었지만 그가 뿌려논 개혁의 씨앗이 오늘에 이어지고 있음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봐야 한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개혁의 주체들 중 누구도 그곳을 찾아본 사람이 없는줄 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했다. 지금의 개혁을 주도하는 인사중 누구라도 정암의 묘와 심곡서원을 찾아보고 당장 성역화는 못하더라도 묘소와 건물의 개·보수를 하고 주차시설을 확장했으면 한다. 개혁은 개혁답게 꽃 피우는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