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14일은 내 낙농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목장부지 3천평, 밭 4천평, 목장 건물 1백10평으로 남 부럽지 않은 친환경 목장이 새로 문을 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낙농 인생도 참 우여 곡절이 많았다. 지난 1963년 2월 21일 경기도 파주시 금능동 386-2번지에서 농사꾼의 5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나 문산 제일종고 축산과를 입학하면서 축산과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복싱 선수를 꿈꾸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고교 시절을 마치며 불행이도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복싱 선수 꿈을 접어야 할 신체적 큰 상처를 입고 방황하던 끝에 지난 83년 한우 육성 비육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부모님께서 기르시던 한우 암소 5마리와 미국에서 도입한 샤로레 2마리등 모두 7마리를 사육하게 된 것이다. 이왕 시작한 이상 지난 85년에는 파주시 농어민 후계자로 선정되어 5백60만원을 지원 받아 한우 만삭 8두를 구입함으로써 이해 말에는 모두 25두 규모로 안정된 축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우는 내 팔자가 아닌 듯 주위 친구들이 낙농을 적극 권고에 못이겨 한우 27두를 팔아 수정단계 젖소 8두를 구입했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 8두를 팔아 만삭 2두와 송아지 1두 등 모두 3마리를 구입했는데 그중 만삭 1두가 분만을 하여 서울우유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됐고 우유를 납품하여 첫 유대를 받았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기분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고 소와 돈, 사회가 무엇인가를 뼈저르게 느꼈다. 이렇게 유대를 모아 만삭 한 마리를 또 사고, 만삭이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를 팔고 빚을 얻어 또 만삭을 구하기를 거듭하자 어느덧 단순한 낙농가가 아니라 전업 낙농가로 성장했다. 그렇게 승승장구를 거듭해 왔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지난 1998년 중부 지방의 대홍수는 당시 젖소 62두, 착유량 8백리터, 축사 4백평이라는 나의 낙농 기반을 앗아 갔다. 그 후 여러 주변 낙농 선배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으며, 서울우유 대의원을 맡게 되면서 새로운 낙농을 하게 됐는데 운명의 여신은 또 한 번 나의 목장 기반을 흔들었다. 지난 2003년 목장 부지 1천6백평중 1천평이 도로에 수용당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머지 6백평에서 낙농을 계속하려 했으나 축산등록제, 원유안정관리 규정에 의한 생산 제한 등으로 고심 끝에 재투자하기로 하고, 오늘의 목장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우유를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목장을 둘러 보아도 “참 깨끗하고 위생적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친환경 목장을 가꿀 것을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