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춘옥(주)건지대표이사 중국을 발을 디딘지도 어느덧 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당시만해도 우리는 경제대란이라는 IMF에서 총칼전쟁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따라서 해외투자란 제고해보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다행히 당사는 IMF인전부터 축산자동화 설비를 수출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나라를 뛰어다닌 것이 바탕이 되어 이제는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그 대상지역으로 중 국을 최우선해서 결정했다. 우선 21세기의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잠재적인 나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음을 인식할 때 비록 언언가 다르고 외국이라는 특이성은 있지만 우리와 유사한 문화를 보유하고 생김새가 같으면서 근거리에 있다는 몇 가지의 요인들이 더 이상 필자를 주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분명 IMF의 중심점에 있는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필자의 결심은 객기에 가까웠고 따라서 동의하는 사람 하나 없이 강행을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을 안고 들어갔다. 1.중국에 회사를 설립하기 까지 한마디로 중국에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은 전등도 없이 첩첩산중에서 길을 찾는 격이었다. 사전에 중국에 관한 자료를 공부하고 갔지만 교과서에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중국은 물론 중국인을 모르고 더구나 누구의 도움을 받고 들어간 것도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막고 품는 식으로 일을 전개해야만 했다. 때문에 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시행착오와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어차피 혼자 내린 결론이니 어찌 하겠는가. 죽든 살든 혼자 만들고 길을 찾아내야지.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매사를 일상적인 한국의 사고 방식으로 접근했다가는 정신병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접근해야 한다. 한국과 비교하거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길이요, 마찰만 유발시키고 따라주는 사람도 없다. 때문에 철저한 자기 희생과 동질감을 느낄수 있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마치 고리 대광실에서 살던 사람이 다리 밑에서 살려면 철저히 마음을 비우고 같은 처지로서의 입장 정리를 해야 하는 것처럼…. 그러기에 중국에서는 사업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중국의 시바이쩌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을 어느 민족보다 잘 극복하고 성공한 민족이 곧 유태인이 아니겠는가. 2. 대련에 자리를 잡은 이유 당초부터 필자는 머지 않은 장래에 통일은 이루어 질 것이고 따라서 그동안 중국의 원조를 많이 받아왔던 북한임을 고려할 때 한국에서의 진출도 중요하지만 중국에서의 진출이 더 빠를 것으로 판단하여 동북 3성(료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일컬음)의 관문이지만 북한과 근거리에 위치한 대련에 회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은 러시아와 경제교류가 잦은 지역이기에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 북한을 겨냥한 나름대로의 포석이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래 전에 중국을 두루 다니며 북한에서 유학한 친구들을 만나 정보 입수했고 실제 신의주와 맞닿아 있는 단동지역에도 방문해 보았다. 또한 동북지역이 여느 지역보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비록 지금은 경제적으로 뒤떨어졌지만 향후 러시아와 북한의 경제가 어떤 형태로는 호전된다면 상당량의 농축산물은 중국에서 흘러 들어갈 수 밖에 없고 이에 상응하여 축산의 발전 잠재력이 크며 아울러 수출입의 원활성까지 감안하여 대련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자리를 잡고 지나온 2년여는 향후 20년 후를 내다보는 영업은 될지언정 현지의 가뜩이나 낮은 경제수준이나 선진 설비에 대한 인식부족이 더많은 시행착오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실제 회사가 대련에 있는데도 동북지역이 아닌 타지역에서 영업 상담이 이루어지는 빈도가 많았고 이때마다 12-20시간 남짓 자동차나 기차를 이용하여 출장을 가야하는 현실이기에 적지 않은 애로와 갈 등을 겪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육로교통이 아직 많이 불비하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물론이지만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필자를 당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종합해보니 역시 뿌리를 찾는 것이 시간과 경비의 효율을 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판단으로 그렇다면 농업의 심장부를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서 북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모든 농축업의 방향은 물론 정책과 정보가 운집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술 보급의 원천이기도 한 중국농업부가 북경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13억 인구 중 아직도 70%가 농업인구라는 것을 감안하면 농업부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고 이들과의 접촉은 중국농업을 한 자리에서 알아볼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