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논에서 농약을 치다 쓰러진 후 어려서부터 키워본 경험을 살려 한우사육의 길로 전환하게 됐다. 소값파동 직후인 당시만 해도 한 두 마리씩 부업으로 키우는 정도였으며, 대부분의 사육농가들이 한우사육은 한물 갔다고들 할 때였다. 전업화를 위해 86년 후계자자금 600만원으로 송아지 12두를 추가 입식하였고 계속 사육두수를 늘려 현재는 200여두를 사육하는 전업규모가 되어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특히, 4∼5개월령의 밑소를 구입, 거세후 황토를 급여하는 사양관리로 7년전부터 브랜드"황토우"로 생산하고 있어 익산지역 특산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01년 수입개방이 되더라도 브랜드에 의한 고급육을 생산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으며 식량산업을 지키기 위해 한우고기 생산에 끝까지 전념할 각오라고 말한다. 한편 아들인 황명(21)씨도 우리 한우산업을 지키기 위해 현재 축산을 전공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한우를 사육할 계획이라고 한다. ▲장한씨(국립수의과학검역원 방역과 연구사)=지난 1985년 1월 21일 당시 가축위생연구소에 첫발을 내딪었으니 올해로 만 15년이 연구소 생활 15년째가 됐다. 입사 당시 기생충과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며 주요 원충성 질병에 대한 연구와 일반 소화기계통의 기생충중 선충류를 중심으로 한 연구에 노력을 기울인 것이 보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주육포자충에 관한 연구 업무를 수행할 때 현미경으로 각각의 포자충을 고기의 근육내에서 찾아 낼 때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구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희열과 재미, 긍지를 느낄수 있었다. 기생충과에 근무할 당시에는 자료실 업무도 동시에 수행하며 연구소내 교육과 홍보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1998년 농림부 동물검역소와 수의과학연구소가 통합되며 기생충과가 폐과됐고 이로 인해 세균과로 발령받아 근무했으며 올 8월 1일부터는 방역과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 15년을 돌아보면 물고기 질병 관련 연구시 양만, 양어장에 출장을 가보면 수의사가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어류질병 관련 연구시에는 연구소가 수산분야의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수산분야가 확장되고 있어도 에산지원이 제대로 안되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기억된다. 앞으로는 농가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연구와 특허를 낼수 있는 연구업무에 중점을 두고 싶다. ▲김태융씨(국립수의과학검역원 검역검사과 사무관)=수의직 공무원으로 임용돼 1985년 8월 19일 첫 임지로 당시 농리부 산하 동물검역소 군산지소로 발령을 받았다. 15년전의 일이다. 2년3개월의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농림부로 복귀해 보부에서 다시 2년 3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동물검역소로 발령받아 서울지소 김포공항 CIQ(보세구역)에서 1년간 근무를 했다. 김포공항은 관광객이 축산물을 휴대한채 입국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통한 해외 악성가축전염병의 국내 유입을 막기위해 세심한 신경을 써야하는 곳이다. 그후 동물검역소 본소에서 1년을 끝으로 농림부로 다시 발령받아 지난 92년부터 99년 11월까지 가축위생과에서 여러 업무를 배울 수 있었다. 현재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축산물검사부 검역검사과에서 수출입 축산물에 대한 검사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15년의 공직생활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부르셀라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부르셀라 파동이후 당시 농가들의 입장에 서서 열심히 일한다고는 했지만 농가들이 농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앞으로는 이를 거울삼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 이제 우리 국립수의과학검역원도 책임경영기관이 된다. 따라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일해나가는 기틀을 마련해야 겠다는 것이 조그마한 바램이다. ▲이만형씨(길샘농장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학동리 88번지)=2세축산인으로서 누구보다도 활발한 양축활동에 나서고 있는 그는 군제대 직후인 85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농장운영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길샘농장은 사육규모에 변화는 없으나 당시 3동이었던 계사도 한동으로 집약됐으며 일일이 수작업이 이뤄져야 했던 계분처리와 집란 등도 모두 자동화 되는 등 전근대적 사육시설의 현대화를 통해 생산비를 대폭 절감했다. 특히 뜻을 같이하는 2세 축산인들과 다한영농조합법인을 설립, 면역항체계란 개발에 성공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숯계란」과 「2050계란」등 차별화된 상품 개발을 통해 직접 유통에 까지 참여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보이면서 바이어들의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이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축협의 새양축가상으로 선정돼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으로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 위생적인 고품질의 상품을 생산, 경쟁력을 더욱 확고히 하면서 틈새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 ▲한경택씨(대한양계협회 닭경제능력검정소장)=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한뒤 2년여동안 민간 종계부화장에서 근무하던 한경택 소장은 군 제대후 학교측의 추천으로 대한양계협회와 인연을 맺게됐다. 협회에서의 처음 시작을 검정소 말단직원으로 시작한 그는 15년간 한곳에서 근무하며 마침내 협회의 닭검정업무를 총괄하는 소장에 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한소장의 생물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신중함과 함께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정확성이 뒷받침 됐기에 가능한 것이라는게 주위의 분석. 검정소의 주목적은 경제성이 우수한 계종을 양계농가들이 선택토록 함으로써 이들 농가들의 생산성 향상은 물론 경제성이 떨어지는 계종의 도태를 유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내양계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자는 것. 이같은 목적에 걸맞게 15년전만해도 국내에는 수십여종에 달하던 상업용계종이 난립하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10여종에 불과하다. 그동안 수많은 계종이 도태된 것으로 그만큼 검정소가 제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증거이다. 아울 러 국내 종계의 개량평가도와 각종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의 하나. 할수 있는 한 검정소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다는 게 한경택 소장의 바램이다. ▲김문근씨(낙농업)=가업인 제재소 일을 하다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자 지난 85년 자형의 권유로 아무런 경험도 없이 의욕만 갖고 낙농업에 뛰어 들었다. 당시 만삭우 한 마리에 250∼300만원씩 하였으며 대부분 바켓스 착유기로 젖을 짜던 시기였다. 5두로 시작하여 점차 규모를 늘려 20여두로 늘려가던 중에 93년부터는 낙농전망이 불투명하고 일도 힘들다보니 의욕마저 떨어져 목장부지를 처분하려던 고비도 겪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자세로 착유시설을 헤링본으로 바꾸고 장비도 구입하다보니 이제는 일도 몸에 익숙해져 착유우 38두에서 1일 1톤의 1등급 원유를 생산하는 전업 낙농가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낙농산업을 지키기 위해 낙농가들 스스로가 고품질 원유 생산은 물론 낙농자조금사업 등의 홍보에도 최 선의 노력을 다하고 올바른 낙농정책이 뒷받침되는 한 낙농산업의 미래는 밝다고 자부하고 싶다. ▲김봉석씨(낙농육우협회)=연암축산전문대를 졸업하던 해인 지난 85년 첫 직장으로 한국낙농육우협회에 입사하여 올해로 15년째 홍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서울역 근처에 있을 당시만해도 회보발송을 전직원이 매달려 일일이 수작업으로 며칠씩 했던 힘들었던 때도 있었으나 수년 전부터는 전산화로 자동발송되고 있고 이제는 홈페이지에 바로바로 게재되는 정도로 발전되었으니 15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님을 실감한다. 그동안 유질분쟁, 고름우유파동 등 큰 사건들로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때마다 월간지를 통해 낙농가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단합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하여 위기를 극복해온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월간 낙농육우지와 인터넷을 통해 낙농가들에게 신속한 정보제공으로 경쟁력을 키워나가도록 노력해 나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