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창간기획/가축개량 성과와 개량 방향<한우>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5.09.26 11:41:07

기사프린트

1974년 처음으로 한우개량 추세 조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 한우능력과 지난 2004년의 한우능력을 비교해 보면 우선 18개 월령 암소의 경우 체중이 245.9kg이던 것이 338kg으로 92.1kg이 증가했다. 또 18개월 수소의 경우는 체중이 지난 74년 289.6kg이던 것이 2004년 512kg으로 222.4kg이나 늘어나 거의 2배에 가까운 개량 성과를 보였다. 또한, 최근 추세를 살펴보면 고급육 출현율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우 개량 역사가 불과 30년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개량성과는 놀랄 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우개량의 30년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광복이전인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한 한우체형 연구가 있었고, 이를 토대로 1938년 처음으로 한우 심사 표준이 제정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60년대 이전까지는 한우가 일소로서 비중이 큰 시기였다. 때문에 이시기의 한우는 전구가 후구보다 발달한 전형적인 일소 체형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80년까지는 우리 한우의 개량 방향이 일소에서 고기소로서 전환한 매우 의미있는 시기였다. 1962년에 농협중앙회에 가축인공수정소가 설치되고, 이어 1964년에는 종축 및 후보종축검사기준이 제정됐다.
또 1967년에는 한우를 일소에서 고기소로 전환하는 순수개량 방침이 결정됐다. 1969년에는 한국종축개량협회가 설립되고 이해에 처음으로 전국한우챔피언대회가 열림으로써 한우 개량은 비로소 그 시동이 걸렸다.
1979년에는 전국 8개 도당 1개소씩 모두 8개의 한우순수계통번식단지가 조성됨으로써 한우개량은 비로소 개량다운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80년대를 개량 전문가들은 개량의 정착기라 말하고 있다.
이 시기에 주목할 한우개량 업적은 1983년에 한우후대검정 사업을 착수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우는 부모의 혈통을 알 수 없는 기초등록단계에서 부모의 혈통이 확인되는 혈통등록과 보통등록 단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 시기의 단계별 등록두수를 살펴보면 1981년에 기초등록 1천1백23두, 혈통등록 4백33두이던 것이 1989년에는 기초등록이 1만2천3백77두로, 혈통등록이 5천5백86두로, 보통등록이 4백71두로 각각 늘어나 등록두수가 10배 이상 크게 늘어났다. 또한, 이 시기는 육류등급제 도입으로 한우개량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는 한우 등록, 심사, 후대 검정 사업이 추진되고 한우개량단지 사업도 확대되면서 개량이 더욱 가속된 가운데 1989년의 육류등급사업 시작은 고기소로서 한우에 대한 개량은 육량 중심의 개량에서 육질중심의 개량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97년 IMF사태를 맞이하면서 우리 한우 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는다. 이해 6월 소 사육마리 수는 사상 최고치인 2백90만두를 넘어 소값이 큰 폭으로 하락한데다 IMF 사태에 따른 극도의 소비 위축이 겹치면서 소들이 무차별적으로 도축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 종부를 선호하는 경향마저 생기면서 한우 개량 관계자들은 “20년 공든탑이 무너진다”고 걱정했을 정도였다.
다행이 2000년대 이후 한우고급육 생산 열기가 더욱 높아지고 한우 브랜드화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우수한 밑소 확보를 위한 개량의 필요성이 한우 사육현장에서 더욱 강조되면서 한우의 개량은 그나마 그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고 앞으로 한우 산업을 지탱할 기간사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우 산업계는 지난 80년 이후 한우 개량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수입 소 파동, 주기적 가격 변동, 개방파고 등을 겪어 오면서도 한우를 어엿한 고기소로 변모시켰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 할 것이다.
이동일 dilee@chuksan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