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서울 강동구 성내동 451번지 구 축협중앙회 청사(현 농협서울지역본부)는 고려 유신(遺臣)들의 회고가(懷古歌)를 떠올리게 한다. 우뚝 선 건물모양이나 터는 그대로지만 그곳을 터전삼아 살아온 ‘그 때 그 사람들’의 모습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일까 시원스레 뚫린 8차선도로를 오가며 그 곳을 쳐다보는 축산 쪽 사람들은 이처럼 씁쓸한 상념에 젖게 된다. 2000년 7월 1일 농축협통합이 이뤄지면서 축협임직원들 상당수는 정든 직장을 떠나고 농협에 남게 된 사람들도 대개는 이 곳 저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여간해서는 만나기가 힘들게 됐다. 그 때 그 사람들의 수장(首長)으로서 축산업협동조합을 대표했던 역대 회장들은 더 더욱 만나기가 어렵다. 역대 축협회장들은 전면적인 시장개방의 예고편이었던 쇠고기수입재개와 UR협상등 전환기 축산업의 고비 고비를 한 가운데서 지켜봐온 조직의 수장이었다는 점에서 재임중 공과(功過)와 관계없이 축산역사의 한 장(章)을 이루고 있다. 이미 축산사(史)의 일부가 되고 만 축협회장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축협과 역대회장들을 얘기하려면 축협의 전신이며, 모태인 축산진흥회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상황이 축협을 필요로 했다 하더라도 축산진흥회가 없었다면 축협출범은 요원했을 것이란 점에서 더 더욱 그렇다. 1978년 4월 1일자로 출범한 축산진흥회의 초대회장은 농림부 차관보를 지낸 함만준씨였다. 함 전회장은 수입쇠고기관리와 축산시책수행에 따른 보조역할을 맡기기 위해 농림부가 급조한 축산진흥회 초대회장을 맡아 결과적으로는 축협이 태동할수 있는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축산진흥회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은퇴하다시피 한 함 전회장은 최근 건강문제로 자택에서 요양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대 회장은 부회장으로 재임하다가 함 전회장의 뒤를 이은 김일로씨. 이미 고인이 된 김전회장은 마지막 축산진흥회장으로서 축협설립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1981년 1월 1일자로 출범한 축협중앙회의 초대회장을 지냈다. 2대 회장을 역임한 이득용씨는 농림부 차관과 농협중앙회장까지 역임한 화려한 경력답게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며 신생축협의 터를 닦는데 기여했다. 은퇴후 최근까지 퇴직축협인들의 단체인 사단법인 축협동우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황산 · 수소가스를 취급하는 경기특수화학 경영에 전념하고 있다. 두주불사(斗酒不辭)형 애주가로 재임시절 술에 얽힌 에피소드가 지금도 축협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이 전회장의 뒤를 이어 3대회장이 된 명의식 전회장도 농림부 관료(차관보)출신으로 축협회장이 된 케이스. 6척 거구에 역시 두주불사형 술실력으로 인해 당시 중앙회는 물론 축협조합장들 사이에 당할 상대가 없었을 정도. 초대 민선회장과 최장수회장(재임기간 7년)의 기록을 동시에 갖고 있는 명 전회장의 재임기간은 어떤 형태로든 축협의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김제육가공공장, 함안사료공장등 현재 농협이 운영중인 대단위 축산사업장은 대부분 이때 건설되었거나 계획이 수립된 것이다. 명 전회장은 93년 퇴임한 후 낙농진흥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축산관련 무역업체인 사해통상(대표 이중해 전한국양록축협조합장)의 고문으로 있다. 송찬원 전회장은 부회장으로 있다가 명 전회장의 중도퇴진으로 회장에 출마, 당선됐다. 기술관료 출신으로서 농림부 축산국장과 한국종축개량협회장까지 역임한 전형적인 전문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재임시절 전문가 답지 않은 구수한 입담으로 축산분야 뒷얘기를 잘해 당시 축협인들 사이에선 축산에 관한한 ‘살아 있는 역사책’으로 통했다. 1998년 은퇴한후 한동안 건강문제로 고전했으나 최근 건강을 완전 회복하고 골프등 운동과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 송 전회장은 축산진흥회가 농협의 축산업무를 이관받아 축협중앙회로 탈바꿈할 당시 농림부 축산국 축산과장으로서 축협출범의 실무를 맡기도 했다. 박순용 전회장은 관료출신의 전임회장들과 달리 협동조합맨으로서 민선 회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공판장장, 전남도지회장등 요직을 역임하다 상임감사에 당선된후 1998년 송 전회장 퇴진후 회장에 출마, 당선되었으나 농축협 통합과정의 와중에서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채 중도 퇴진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육가공을 전공한 농학박사이기도 한 박 전회장은 특유의 할동력으로 현재 한국종축개량협회장을 맡고 있다. 축협의 마지막 회장인 신구범 전회장도 농축협 통합의 와중에서 고생만 하다 물러난 비운의 주인공이다. 농림부 축산국장,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신 전회장은 당시 통합에 반대하던 전국조합장과 임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조직을 단시간에 정비하고 국회 농해위 회의장에서의 할복과 헌법소원등 격렬한 반대투쟁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채 물러났다. 신 전회장은 축산국장시절 마사회이관에 반대하며 감히(?) 6공 실력자와 맞서다 타의에 의한 미국유학을 떠난 인연으로 인해 축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제주도지사 재임시에도 과감한 축산시책을 펴 도내 축산인들의 인기를 끌었다. 퇴임후 통합반대투쟁등 각종 송사(訟事)로 고전했으나 지금은 유기농관련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대 축협회장들의 재임기간은 축산진흥회장을 포함해도 평균 2년 7개월 남짓하다 이들의 면면에서 알수 있듯 축협회장들은 초창기 3명을 제외하면 재임기간이나 퇴임하는 과정이 순탄치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의 불운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축협중앙회도 불운속에 조직의 수명을 다해야 했다. 축협의 이와 같은 불운을 두고 뿌리가 깊지 않은 조직의 한계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이젠 운명이란 단어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옛집이 그 터위에 그대로이듯 축협의 발자취는 축산사(史)에 그대로 녹아 있다. 역대회장들의 발자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길호 kh-kim@chuksa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