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모로부터 터득한 삶의 지혜의 두 번째 사례를 소개한다. 옛날에 우리집은 걸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들은 종종 밥을 얻어먹기 위해 해뜨기 전부터 우리집 대문에 머리를 내밀고 아침밥 좀 달라고 청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우리형제의 밥을 줄이더라도 밥상을 차려 마루에 놓아두시고 걸인들이 마을을 한바퀴 돌고 와 마루에 앉아서 아침을 먹고 가게 하셨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나그네가 가는 길이 저물어 하루 밤을 재워주기를 부탁하면 언제든지 허락을 하셨다. 그런가하면 마을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춘궁기(春窮期)에 쌀을 주시니, 그래서 그런지 항상 우리 집에 행사가 있으면 그 분들이 자진해 집안일을 도와주셨다. 물론 내가 대학교 2학년까지는 아버지께서 거의 15년 이상을 마차로 장작장사를 하시면서 재산을 모으시느라고 우리에게는 보리쌀도 많이 들어가지 않은 감자밥으로 여름 끼니를 때우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도울 사람은 항상 도와주면서 생활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찐 감자라면 어린 시절에 신물이 나게 먹은 터라 지금도 먹고 싶지 않다. 세 번째 사례는 6.25 남침이 발생을 해 정부가 부산으로 퇴각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 경찰관으로 근무하시던 셋째 숙부께서 후퇴시던 와중에 안양에 위치한 우리 집에 들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며 큰절을 올리고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9.28 서울 탈환으로 돌아오실 때에도 안양 집에 들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살아서 돌아 왔습니다”라는 인사를 하고 서울로 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숙부 및 당숙들 모두가 가정의 평안을 위해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베푸는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의 공무원 시절, 김영진 박사의 가르침을 본받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항상 주위의 고생을 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때론 소주잔도 기울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 어려운 일도 잘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도전적인 성격이 강한 탓에 어떤 경우에는 모험을 해야만 하는 일들을 과감히 추진하다보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심하라는 충고도 많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말 없는 어린아이에서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성격으로 변화된 것은 가정 환경적인 요인과 더불어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아야 하겠다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 내 가슴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날의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면 1968년 8월에 내가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 가금과(家禽科)에 적을 두고 계사(鷄舍)에서 현장근무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축산시험장을 방문하셨고, 계사를 순시하시고 나오시는 입구에 나와 강만석 선배를 비롯해 3명이 도열을 해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전에 청와대 경호원들이 “대통령은 많은 사람을 접하다 보니 당연히 악수를 할 때에 손을 대는 듯 마는 듯 해야 한다고”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대통령께서 내 앞으로 오시자 나는 “축산연구사 이인형입니다”라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대통령의 손을 힘을 주어 꼭 잡고 악수를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나의 이름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으시고 다시 제일 앞으로 가셔서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시면서 격려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그때에 내가 대통령의 손을 꽉 잡은 것을 경호원들이 알았다면 나는 윗사람으로부터 좋지 않은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대통령께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돌아서서 말씀을 해 주셔서 곤란할 수 있었던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짱이 어려서부터 터득한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