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살아가다 보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연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나에게는 수없이 많은 시험에 떨어진 별난 사연들이 있었지만 또한 기적같은 합격의 환희도 맛보았기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래서 나이가 칠십이 된 지금도 시작한 일은 결실을 거두려고 최선을 다하며, 항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일을 개척해 앞만 보고 달려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머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시험에 떨어진 첫 번째 사연을 소개한다. 내가 안양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때에는 교장선생이 색맹을 가리는 책과 다른 한권의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구두시험을 본 것으로 생각이 나는데 내 일생에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포기했다가 해방이 돼 입학을 하게 됐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자체가 웃음거리일 것이며, 내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는 첫 번째 사건이며, 학교를 다니면서 우등상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사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을 가기보다는 사관학교를 입학해 부모님의 학비조달 걱정을 덜어 드리려고 했으나 평발이라는 이유로 필기시험은 보지도 못하고 육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하교 신체검사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사연은 1969년에 축산시험장에서 연구관 승진시험에 떨어져 쓰디 쓴 고배를 맛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나 심적인 고통은 가장 커 마음속 깊이 상처를 안겨줬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험난한 인생의 길이 가는 곳 마다 기적과도 같은 순탄한 길로 변화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 그런가하면 꿈같은 합격의 환희와 기쁨을 맞보기도 했다. 첫 번째 사연은 내가 안양초학교를 졸업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내 성적은 앞에서 두 번째가 아니라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꼴찌는 나와 같은 안양읍 비산동에 사는 김민웅이라는 주먹이 세고 성격이 활달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 덕에 나는 꼴찌를 면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행운을 잡은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나는 그때에 중학교 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담임선생은 물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중학교에 합격한다는 것은 그 성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신 것 같았으며 아버지의 농사일 후계자로 일찌감치 진로를 확정한 상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모두의 무관심속에서 안양중학교 입학시험을 봤으며, 시험을 본 후에도 어느 한 사람도 시험을 잘 봤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고민을 하면서 합격자 발표하는 날을 기다리다가 혼자서 안양중학교의 합격자 발표장을 갔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합격자를 발표한 게시판을 자세히 살펴보니 합격자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수험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후에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와 시험에 합격했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합격했느냐고 다시 확인을 하시더니 옷도 갈아입지도 아니하시고 그대로 신발을 신고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시는 것이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내 짧은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