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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형의 ‘황소 발자욱’ / 제2부 시련은 극복하라고 오는 것

첫 직장 적성 안맞아 과감히 사표 서울시청·농진청 동시합격 ‘영광’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6.09.11 11: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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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첫출발서부터 맞이한 시련 Ⅱ

고령군 매촌리로 발령을 받은 나는 여성정치인으로 유명한 박순천 여사가 살던 마을에서 하숙을 하게 됐다. 하숙집과 마을이장 집에는 혼인 적령기가 된 딸이 있었고 특히 여자 4H회장은 박순천여사의 외손녀로서 출중한 미모를 갖췄다. 내가 업무로 인해 이집 저집을 방문하면 어느 곳에서나 ‘서울총각’이 왔다고 대우를 잘 해주었다.
아침 새벽부터 출근해 각종회의에 참석하고 농사일부터 가정 문제까지 사람을 만나 설명과 상담을 하고나면 하루해가 저문다. 빡빡한 일과를 마치고 밤늦은 시간에 하숙집으로 귀가하면 항상 책상위에는 동동주가 하얀 사기그릇에 담겨 놓여 있었다. 그런가 하면 때때로 여성4H회장이 시루떡과 연시를 가지고와 꿀맛 같은 밤참을 챙겨줬다. 이러한 부분은 고단한 일과 속에서도 나름대로 행복감을 줬다.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고지식한 성격과 능력으로는 담당하기가 어려운 직업이라는 판단하게 됐다.
처음 매촌리로 발령이 날 때에 농촌진흥청 인사계장인 H계장이 경기도를 지원했는데 매촌리로 발령을 내 미안하다며 6개월만 기다리면 경기도로 옮겨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5월초가 되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업무도 내 성격과 도저히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두 달이 지나서 아직도 사표가 수리 되지 않았고 경기도 연천군 농촌지도소로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바로 연천군지도소에 가서 사표를 다시 내려고 아버지께 그간의 사정 말씀을 드렸더니 “어떻게 잡은 직장인데…”라며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끝내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냈는데 이때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 1997년 정년퇴임한 축산시험장에서는 하루에 4갑까지 피우기도 했다.
그 후 2~3개월이 지난 초가을 어느 날 서울시청에서 축산기술자 1명, 그리고 얼마 뒤에는 농촌진흥청에서 연말에 축산연구원채용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다시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몰입했다. 그리고 두 곳 모두 합격을 했는데 특히 서울시청은 1백51대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안았으니 내 머리가 학교 다닐 때에 비하면 현격히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격한 두 곳 중 한곳을 선택해야 하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던 중 대학 스승이신 오봉국 교수님께서 우선 지내기는 서울시청이 나을 것이나 기술자로서의 장래를 위해서는 농촌진흥청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말씀을 하셔 고민 끝에 축산연구원을 선택하게 됐다. 나는 그해 1962년 12월 6일에 합격자 중에서는 첫 번째로 농촌진흥청 농림교육원 교수부 교관(축산연구사보)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격언의 문구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성공한자는 자신의 행로가 맞지 않을 때 주저 없이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지만, 실패한자는 길의 방향이 틀리더라도 이제까지 걸어온 노력이 아까워서 도중에 포기하지 못한다.” 라는 격언이 있듯이 내가 그 때에 대담하게 모두의 걱정을 뿌리치고 성격에 맞지 않던 첫 직장을 떠나서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두 번째 선택한 공직에서 36년간을 모험과 도전으로 일생을 마무리 했다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하면서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