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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형의 ‘황소 발자욱’ / 제2부 시련은 극복하라고 오는 것

말썽 많은 국립종축장 전출 ‘운명적’열정으로 난관 극복 ‘오랜 화젯거리’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6.09.13 11: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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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운명의 길 Ⅰ

나는 농림공무원교육원에서 고신근철 교수부장(강원도진흥원장, 제주시험장장 역임)과 김영진 과장(농림부차관보, 농촌경제연구원장, 농촌진흥공사사장, 총리실 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역임)을 모시게 되면서 이때 아내인 신영자씨를 만났다. 특히 김영진 과장으로부터는 검소한 생활훈련 등을 혹독하게 받아 인생의 큰 틀이 형성되게 됐다.
고령지시험장을 거쳐서 축산시험장에서 근무하는 중에 연구관 승진 시험에서 떨어지게 돼 초등학교입학시험에서 떨어진 이후 두 번째로 인생에 큰 쓴맛을 보게 됐다. 그 후 국립종축장으로 전출을 하게 됐다.
그 당시에 연구관 승진은 농촌진흥청장이 1명을 추천해 승진을 시켰는데 바로 그때에 H씨가 대학원을 수료했다는 사유로 승진을 했다고 한다. 내가 어느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한 것이 처가의 집안 어른이신 신두영 총무처차관(수원농림고등학교의 김인환 청장의 선배임)에게 전해졌고 김인환 청장의 부름을 받아 신차관을 어떻게 아느냐는 물음을 받기도 했다. 그 후부터 총무처에서는 연구관 및 사무관 승진에 5배수를 추천해 시험을 보는 제도가 시작됐는데 5명이 추천을 받아 2명은 포기하고 3명이 시험을 치러서 내가 낙방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내가 연구관 승진시험에 합격을 했다면 축산시험장에서 근무를 했을 것이며 지금의 이인형이가 아닌 다른 모습의 이인형으로 살아 왔을 것이다.
그 당시에 국립종축장은 개량기관으로 출발한지 2년째를 맞고 있었으나 정착 되지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남신 장장(농림부 축산국장 역임)께서는 연구관시험을 치르기 전부터 연구관으로 승진을 시켜 주겠으니 국립종축장으로 오라는 것을 나는 사양하고 시험을 보았으며, 낙방한 후 1971년 1월 15일자로 국립종축장으로 전출을 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다시 직장을 사직한 후 새로운 선택에 도전하게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농림공무원교육원에서 나를 포함해 교관으로 같이 발령을 받은 축산, 임업, 토목 및 농어연구원 등 8명중 내가 강의 평가 1등을 차지하게 됐으며, 전국의 축산산업 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 1개월 교육과정에서 우등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전출하게 된 국립종축장은 그 시절 배합사료와 건초의 도둑이 많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젖이 많이 나는 젖소의 발뒤꿈치를 삽으로 찍어 도태하게 하는가 하면, 목부가 일을 많이 시킨다는 이유로 연구관을 구타하는 일들이 횡횡했다. 춘추전국과도 같은 시기였지만 나는 이곳의 전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6년간 열정으로 업무에 몰입했다. 또 많은 동료의 지원을 받아 역경들을 헤쳐 나가하며 그 어려운 시기를 잘 수습할 수 있었다. 그 일은 지금도 종종 오래전의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대학시절 스승이신 고육종융 교수에게 농림공무원교육원에서 낙농학 강의를 하게 됐다는 인사를 드리러 찾아뵌 적이 있다. 그때 스승님은 “어느 직장, 어떤 새로운 업무를 분담 받더라도 6개월 내에 코피 흘릴 정도로 업무를 파악하고 앞으로 할일의 방향을 정해 실천에 옮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를 마음속 깊이 세기고 정년퇴임 때까지 실천하려 노력하다보니 어느 때는 나도 놀랄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