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이인형의 ‘황소 발자욱’ / 제2부 시련은 극복하라고 오는 것

‘농림부로 승진 전출’ 뜻밖의 제의 고사 불구 낙농과 초지계장직 발령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6.09.18 11:31:42

기사프린트

▶내가 선택한 운명의 길 Ⅱ

내가 국립종축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것은 박남신 장장, 장덕희 장장, 남욱 장장, 김영진 장장 그리고 김일로 장장께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고, 모든 동료직원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당시 농림부에 소속돼 있었던 국립종축장장은 1급기관장(농림부의 차관보와 기획관리실장급)으로 대부분 국장에서 승진해 왔으며 재임기간이 1년을 넘는 경우가 적었다.
나는 국립종축장에서 6년차 근무를 하던 해에 또 다시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 때는 1967년 봄, 농림부의 장덕희 차관께서 국립종축장내의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 오셨다. 나는 항상 일요일에는 현장에서 있었기에 연락을 받고 바로 찾아가 인사하고, 같이 낚시를 하면서 보조를 해 드렸다. 그때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차관께서 예전의 여러 가지 종축장 현안들을 기억하시고 현 상황을 나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제는 대부분의 과제들이 해결돼 종축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정착됐다”는 말씀을 자신 있게 드렸고, 이를 들으신 차관도 나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2개월이 지난 6월 어느날 농림부 박효작 총무과장이 차관께서 이인형 연구관을 농림부로 발령 내라고 하셨다며 사료과의 검사계장과 낙농과의 초지계장 자리가 공석인데 어느 자리를 선택하겠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집사람과 3일간을 고민 하다가 생각을 정리한 끝에 전화를 걸어 “저는 기술자로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한 만큼 농림부로 가지 않겠다”는 말을 정중히 드렸다.
그러는 사이에 농림부 축산국장께서 나를 서울에서 만나자고 해 찾아갔더니 국립종축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으니 농림부로 전출할 생각을 접으라며 나를 설득하셨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또 다시 몇 달 후에 박효작 총무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와 차관께서 초지계장으로 발령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른척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때에 나는 계장급의 인사는 국장이 반대를 하면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농림부 자체에서도 승진 할 사람이 많아 복잡하다는 국장의 말씀을 듣기도 해 다 잊고 있었다. 나는 다시 집사람과 의논을 하니 아이들 교육문제도 있고 하니 서울로 가자고 해 총무과장의 말씀대로 조용히 있었다. 그 얼마 전에 농림부를 방문해 김영진 차관보를 찾아뵙기 위해 가는 길에 광화문종합청사 5층에서 우연히 남 욱 기획관리실장을 뵙고 인사를 드렸더니 남 실장이 “이 계장, 사람은 큰물에서 커야 되는 것이니, 농림부로 오라고 하면 따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항상 인사문제가 있을 때면 큰 시련을 맞았는데 이때에도 어렵게 1977년 10월 1일자로 농림부로 발령이 난 것이다. 나는 사령장을 받으러 가보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직장생활 또한 험난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굳게 다지고 출근을 했다.
농림부의 직장 생활 15년은 일과 사람의 부대낌 속에서 기본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니 과장으로 승진했고, 1993년 1월 1일자로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장으로 승진해 이제는 기관을 경영하는 책임자로서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봉사하는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