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신문이 걸어온 지난 21년을 회고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지만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할지 며칠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내가 축산신문을 짝사랑하게 된 사유가 무엇인지 오늘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자에서부터 회장까지 성실한 생활하니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원인 중에 하나인 것 같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고자 한다. 그 중 하나가 축산신문기자들이 너무 너무 축산인과 축산현장을 좋아하고 항상 그들 편에서 기사를 다뤄 왔다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일부 사람들은 축협조합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이 기사화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축산인을 위한 축협조합, 축산을 경영하는 축산인을 위한 축협이기에 그들을 격려해주고, 그들이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국민에게 아니 축산분야 축산농가, 교육자, 공직자 그리고 기업인에게 알려주는 것은 역시 축산산업분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축산신문의 역할이 아닌가? 그리고 항상 내가 축산인 중에서는 현장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누비고 다닌다고 생각하면서 현장을 다녀 온 후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윤봉중 회장을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보다 상세하게 알고 있기에 나는 항상 뒤를 따라 다닌 경우가 많았다. 나는 경쟁심이 생겨 농림부 그리고 축산시험장에 근무할 때는 시간이 있는 날이면 항상 현장에 출장을 나가니 축산국장이 새로 부임해서 대개 6개월이 지나면 현장사정을 정확히 파악해 대처를 하니 이해하게 됐고, 농촌진흥청에서는 항상 출장을 다니고 언제 일을 하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연락도 없이 오전에 축사신문사를 방문해 기자 한 사람이 있던지, 두 사람이 있던지 그들과 잡담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이나 하자고 해 점심은 주로 우리의 전통식품, 서민의 애증이 담긴 탕을 하면서, 그들이 발품을 팔아 터득한 정보를 은근 슬쩍 머릿속에 넣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마 내가 쓴 이글을 기자들이 읽고 나면 앞으로는 나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자주 만나지도 못할 것이며 어쩌다 1년에 한두번 만나더라도 축산의 현장정보보다는 내 노후인생을 즐겁게 사는 참삶의 방법이 필요하니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해 뒀다가 그 옛날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만날 때에 좋은 정보를 알려주시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씀을 남기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축산인 체육대회와 축산인 등산대회 그리고 축산인 신년교례행사는 축산신문에서 개최하는 연중 가장 큰 행사로 참석하는 축산인들을 즐겁게 해 줬다. 나는 농림부와 축산시험장에 근무할 때에는 축산인 체육대회에 나가 직원들과 같이 각 단체, 각 대학, 각 기관에서 출전한 팀의 선수들과 경쟁해 우승을 하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어서 우승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우승컵을 안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이 있나하고 찾아보았으나 헛수고만 했고, 내가 우승컵을 안고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만 더 마련할 수 없는지? 체육대회가 소풍가는 날처럼 기다려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신년교례행사는 매년초에 실시하는데 전국 축산산업현장을 이끌고 있는 인사 5백여명이 모여 지난해를 회고하고, 새해를 맞아 각오를 달리하면서 우정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하고 큰 행사인가? 그 큰 행사를 항상 질서있게 그리고 차분히 준비하고 이끌어 가는 것은 회장과 임직원들의 단합된 노력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며, 어쩌다가 신년교례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우리나라 축산을 아끼는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바꿔 놓은 활력이 넘치는 행사장으로 정착하게 됐다. 그 중에 매년 등산대회를 개최하면서 우유와 계란 등 각종 축산식품의 소비촉진홍보는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훈장을 받아야할 아름다운 행사를 오래도록 이어서 실시하고 있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축산인 신년교례행사, 축산인 등반대회 그리고 지금은 중단한 축산인 체육대회는 항상 참석을 했으며,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직장근무의 연속이라고 생각해 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하면 공무원의 임무는 관련분야에 대한 정보를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불편사항 등을 빨리 파악하고 정리해 정책을 개발함과 동시에 가장 빠른 시간내에 행정서비스를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이 의무요, 책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 나감으로써 축산산업분야는 물론이고 학계와 각종 단체의 사람들과 사귈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1999년 10월 23일에 나는 축산신문의 축산인 등산대회에 참여하여 춘천에 있는 주봉이 용화봉(6백54m)과 함께 청운봉(5백46m), 등선봉(6백32m) 3개이므로 삼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 높지는 않지만 기암괴석으로 능선이 이루어진 아름다운 삼악산을 다녀왔다. 그 날 등반은 나에게는 1988년 후반기부터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힘겨운 생활을 하는 중에 등산대회에 참여해 체력을 점검하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그 날은 한국유가공협회 이흥구부회장과 같이 빠른 길로 넘어 간다고 샛길로 들어서서 오히려 길도 없는 돌 바위가 험한 능선을 타고 정상까지 오르느냐고 고생을 했다. 그 때에 정상을 넘어서는 길목에서 이흥구 부회장, 김선중 교수와 같이 축산신문사 사기(社旗)를 앞세워서 사진을 촬영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주 10월 29일에 발행된 축산신문에 그 사진이 크게 실린 것을 친구가 보고, 인형이 너는 우리 동창모임(1박2일 행사임)에는 참석하지 않고 등산대회에는 다녀왔다고 서운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마침 그 다음 날이 집사람의 회갑행사를 하는 날이라 가족과 같이 지내게 돼 동창회에는 참석이 불가능했고, 축산인 등산대회는 나에게는 공적인 행사요, 공무의 연장선상에서 근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이해시킨 일이 있었다. 물론 각자의 처한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으나 축산산업의 현장을 찾아가서 축산업을 경영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하루에 3~4개 농가를 방문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이러한 행사에 동참을 하면 여러 사람을 한번에 만날 수 있고 토론의 장이 될 수도 있어서 좋다. 또한 축산산업, 그리고 축산인이 있기에 축산공직자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사유로 나는 모든 행사에 가급적 참석해 축산인들과 만나는 것을 즐겁게 생각을 했고, 그들이 즐거운 날을 보내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 이상의 무었을 바라겠는가? 그래서 공직자의 행동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며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축산발전대책위원회 운영, 각종 세미나 그리고 각종 축산식품의 소비촉진홍보 등을 계속해 노력하는 축산신문이기에 매력을 느껴 내가 좋아하게 됐던 것 같다. 1984년의 소 파동의 흔적이 남아 있던 암울한 시기, UR협상이 시작되기 전해인 1985년에 축산신문이 출생을 해 축산산업의 전ㆍ기업화(專ㆍ企業化)를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축산산업의 경쟁력향상을 위헤 축산농가의 변신을 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담당해 오면서 축산분뇨의 자원화와 각 축산식품의 품질고급화 그리고 자연친화적이면서 아름다운 농장 만들기, 농지를 활용한 친환경 축산과 경종농업을 연계한 농업의 근대화를 이루게 하기위한 농지법개정 등 각종 제도개선에도 많은 노력해 왔고 현재도 계속해 노력을 하고 있는데 대해 비록 현장은 떠나 있지만 축산인의 한사람으로서 축산신문의 임직원과 회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제 우리의 앞에는 또 FTA라는 암초가 앞을 가로 막고 있어 모든 축산인이 답답해하고 있다. 물론 정부의 정책방향도 중요하지만 축산신문의 임직원 여러분께서도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축산산업계에 알리고 이해하도록 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힘든 일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