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립종축장에서 농림부로 전출을 한 이후 당시 생활을 돌아보면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도 축산국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못 먹는 술을 먹어야 했다. 농림부로 전출한 1977년 10월부터 6개월간의 봉급이라고는 한 푼도 집에 내 놓을 수 없었으며 집에 귀가하는 시간도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운 자정이 되어서였다. 그런가하면 1978년 봄부터 제주축산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느라고 3개월간을 여관에서 작업하면서 집에는 가끔 들어가니 나의 아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하루는 3일 만에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가 밥을 달라고 하니, 아내가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으며 무릎을 같이 꿇고 앉았다. 그러자 아내는 당신 직장 일에 얼마나 만족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서슴없이 85%는 돼 B학점은 될 것이라고 답변을 했다. 그제서야 아내는 알겠다고 하면서 따듯한 저녁상을 차려주었다. 결혼 후 무릎을 꿇고 무언의 싸움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월의 어느 날 오후 6시경 광화문 종합청사 뒤의 사직동에 있는 내과원장이신 처고모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퇴근할 때에 병원에 들르라기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아도 와서 보면 안다는 답변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예감이 좋지 않아 바로 퇴근을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처고모부께 인사를 드리자 아무 말도 없이 301호 입원실에 네 처가 입원해 있으니 가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심한 것은 아니고 2~3일 치료만 받으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병실을 올라가 보니 집사람이 침대에 누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처고모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며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으니 처고모는 인사도 받지 않으시고 나를 보자마자, “자네가 가장(家長)인가? 이게 무슨 일인가”라고 꾸짖는 것이었다. 나는 답답해서 자세히 말씀을 해 달라고 청했더니, “자네가 집에 언제부터 봉급을 갖다 주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더 욱 목소리를 높이셨다. 나는 아내가 고모님께는 돈을 얼마를 빌려 썼습니까? 하고 여쭈어보니 망설이다가 45만원을 갖다가 생활에 보태 쓴 것 같다면서, 가장 노릇을 똑바로 하라고 또 다시 걱정을 하셨다. 나는 인사를 드리고 입원실에 있는 아내를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한데 아이들마저 나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기에 아버지가 잘못했다고 아이들에게 생전 처음으로 사과를 해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재물에 대해 신세를 지기 싫어했으며 빈곤 속에서도 자립으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젖 먹던 힘을 다하라든가, 용을 쓴 다는 말. 그 당시에 나는 돈이 없어도 형이나 아버지에게는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처고모에게 돈을 갚기 위해 친구인 구능완 학형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50만원을 융통해 다음날 처고모에게 같다드렸다. 그러면서도 체면을 구기기 싫어서 이자까지 다 받으시라고 했다. 그 당시는 내 사정을 다 말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참 삶보다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하는 생존차원에서 대처해야 하는 처지였다. 굳이 내가 이러한 궁핍한 시절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사에 마음만 먹고 몰입을 하면, 자연의 법칙 이외는 모든 것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 내 인생에 많은 참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