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구관으로 승진이 돼 육성우사를 담당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 송아지 설사로 죽는 두수가 더 늘어났다. 어느 정도 큰 4~5개월 된 송아지가 운동장에서 물을 많이 먹고 급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루는 아침관리시간에 일찍 나와서 오늘은 케이지에 있는 송아지와 축사에서 사육하는 6개월 미만의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시간에 물을 급여하도록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2시에 물을 급여하지 않았던 송아지에게 일제히 물을 급여하라고 지시를 하고 사무실에서 무슨 연락이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한 30여분이 지났을까. 보조원 반장이 숨을 가쁘게 쉬면서 사무실로 급히 들어오더니 큰일 났다며 큰 송아지 3마리가 물을 먹다말고 운동장에 쓰러져서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의사에게 연락해 치료를 부탁하고 현장에 나가질 않았다. 한참 만에 치료를 마친 수의사로부터 소 한 마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수의사는 어찌된 일인지 케이지에 있는 어린 송아지들 대부분이 설사를 심하게 해 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무엇인가 관리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만 물을 오랜 시간 마시지 않다가 갑자기 허겁지겁 많이 마시면 물에 체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날 퇴근시간에 모든 보조원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하면 송아지가 설사를 하고, 죽게 될 수 있는 것인가를 오늘 공부를 했으니 앞으로는 인위적(人爲的)으로 사고가 발생을 하도록 하면 인정사정없이 처벌하겠다고 예고를 했더니 그 후부터는 점차 개선이 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 송아지의 발육이 좋아 졌고 죽는 숫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배합사료수급 및 공급업무와 연구관 3명이 각각 1개 우사씩을 담당하던 것을 나에게 착유우사 제1우사, 제2우사, 제3우사를 모두 관리하라는 업무분담이 시행됐다. 물론 이렇게 업무분담을 시키신 기관장은 오랜 시간동안 더 많은 고뇌를 했겠지만 나에게는 나의 미래에 대한 운명의 기틀을 닦는데 중요한 시간이 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시샘도 받았고 곱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국립종축장으로 온지 3년이 되는 해에 나에게는 진퇴양란(進退兩難)에 처한 운명을 가름할 중대한 시간이 왔고, 가장 큰 시련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 승부를 건 도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내가 일개 연구관으로서 국립종축장의 중요한 업무를 모두 책임지게 됐으니 좋은 결과만이 나의 앞길이 열릴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실패(失敗)의 경우를 생각하니 겁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과 공휴일은 현장에서, 추석과 설날도 현장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이 결심은 국립종축장에서 농림부로 전출을 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 때부터 나의 하루의 일과는 새벽 4시에 우사를 한바퀴, 아침에 출근 할 때에 한바퀴, 점심을 먹고 한바퀴, 오후에 저녁을 먹고 사무실에 나올 때에 한바퀴, 밤 10시를 전후해 퇴근 할 때에 한바퀴를 합해 하루 평균 4바퀴이상은 현장을 돌았다. 이렇게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어서 다른 방법도 병행해 실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