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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형의 ‘황소 발자욱’ / 제3부 내 인생에 승부를 걸었던 사건들

뉴스관리자 편집장 기자  2006.11.20 10: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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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류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Ⅱ)

농림부에서는 이미 1981년 6월 5일부터 위기사항으로 판단하고 축산국 축산물가공이용과 직원들이 비상근무에 돌입해 2개월째 사무실 책상위에서 잠을 자고 지내는 시기였다.
그리고 7월 중순부터는 국무총리실이 주관하고 경제기획원과 농림부 등의 국장급이사들이 참석하는 대책회의를 매주 1회 이상 개최해 주요한 소 값 대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농림부에서는 세부추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던 중 7월말부터 농림부가 쇠고기 수급 안정을 책임을 지고 추진키로 해 1981년 8월 4일부터 쇠고기수급안정대책을 오후 6시에 장관실에서 매일 열게 됐다.
그 당시 소 값의 상승과정을 살펴보면 ’80년 12월(82만8천원/400kg)→’81년 3월(1백만5천원)→’81년 7월(1백179천원)로 7개월 사이에 142%가 폭등을 했으니 누구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담당과장으로서 매일 시장상황을 점검하러 다니다가 강남의 한양슈퍼에서 수입쇠고기를 포장해 판매하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거의 1주일간을 매일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며 점검한 결과 수입쇠고기를 냉동포장육으로 제조해 판매를 하면 한우로 둔갑하는 것, 중량을 속이는 것, 가격을 속여 파는 것 등을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 다음 일요일에 장관을 모시고 현장을 안내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수입쇠고기를 늘려 쇠고기가 부족해 발생하는 파동을 막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3등급을 수입하던 것을 2등급으로 수입했으나 지육(枝肉: 뼈가 있는 그대로 수입한 고기)으로 수입함으로 한우로 빼 돌리기가 쉬웠고, 식육업소에서는 한우고기와 수입고기를 동시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어 인위적으로 한우로 둔갑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따라서 냉동 수입쇠고기포장육으로 생산해 판매하기로 결정을 하고 축협중앙회와 몇 번에 걸쳐 협의를 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라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때에 내적으로 축협중앙회는 수입쇠고기의 저장과 판매 수수료를 지급받고 있어 사실상 어려운 모험을 걸 수밖에 없는 일에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선회해 그 당시에 냉동창고의 수입이 감소해 경영난을 겪고 있는 한국냉장주식회사에 수입쇠고기 냉동포장육사업을 할 의향이 없느냐고 의견을 타진한 결과 무조건하겠다는 확답을 얻었다. 나는 즉시 한국냉장에서 시험생산을 하는 것으로 결정 하고 대책회의에 안건으로 1981년 8월16일에 상정을 했다. 대책회의에는 농림부 관계과장, 관련국장, 차관보와 실장, 차관, 축협회장과 이사, 농협중앙회 이사 그리고 관계자, 한국냉장 사장과 이사 및 관련 시와 도 국장 등 이 참석했으며, 매일 보통 2시간 이상씩 회의가 진행됐다.
그날 대책회의는 이미 내가 예상했던 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내가 냉동수입쇠고기 포장육사업에 대해 설명을 마치자마자 축협중앙회 회장께서 “가공이용과장은 육류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전문가의 의견도 무시하고 일을 하겠다고 설치는데, 이것은 안 돼는 사업이며 물가안정과 수입쇠고기 둔갑방지를 위한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장관께 장황하게 설명을 하시는 것이었다. 축협중앙회 회장님은 내가 성환의 국립종축장에서 모시고 근무를 했던 인연이 있으며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셨던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