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축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음은 이미 축산통계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축산의 발전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우리 축산이 집집마다 외양간에서 소 한두마리를 매어 기르고 돼지 우리에 돼지 몇 마리, 닭장에 닭 몇마리 기르던 수준의 부업축산에 머물고 있을 때 이를 과감히 탈피하고 전업화, 기업화해야 경쟁력을 갖출수 있다고 주장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정말 불모의 우리 축산을 일구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60년대 혹은 70년대에 활동한 그분들은 30∼40년이 지난 지금도 축산현장에 있는 경우도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작고한 분들도 있다. 축산초기에 우리 축산을 일구는데 큰 역할은 분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대가축 분야에는 우선 황영구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황영구씨는 두 번에 걸쳐 축산국장을 지내고 한국종축개량협회와 낙농육우협회장을 거쳐 지금은 이 양협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90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축산의 역사를 집필하는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음은 유윤수씨. 황영구씨보다 두 살 아래인 유윤수씨 역시 축산국장을 거치고, 서울우유조합장, 낙농육우협회장을 역임하고, 이제는 건강 때문에 집에서 칩거하고 있다. 김태신씨는 비육우 1천5백두, 젖소 6백두 규모의 태신농장을 일구며, 우리 젖소 개량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사양관리 개선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는 아들에게 젖소 사육을 맡기고 김태신씨 자신은 비육우를 관리하며, 3천두규모정도의 양돈 경영도 구상하고 있다. 강성원씨는 서울우유조합장, 종축개량협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성원목장과 성원유업 관리에 전념하고 있는데, 성원유업은 목장내 우유가공공장을 설치하고 국내에서 가장 위생적이고 고급의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과 함께 기업목장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신정목장의 박봉성씨는 지금은 고인이 됐고, 그 아들들이 목장을 경영하고 있다. 전중륜씨는 대관령 황병산 8백고지에 초지를 조성, 80년대 초반 크게 주목받았는데 이제는 고인이 됐다. 그의 큰 아들 전응진씨가 회장으로 있다. 최명재씨는 파스퇴르유업을 설립, 유질이 우수한 원유를 저온살균처리를 통해 가공함으로써 우리나라 우유의 품질 향상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직도 회장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권오걸삼보목장대표는 우리 나라 낙농 초창기에 젖소개량에 크게 기여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종축개량협회 고문으로서 아직도 낙농에 열중이다. 경기 화성에서 육릉목장을 경영해 왔던 지재선씨는 낙농육우협회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장은 2세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이윤우씨는 대를 이어받은 낙농인으로서 낙농육우협회장을 역임한바 있다. 아직도 1백10두 규모의 목장을 고용노동없이 손수 일하며 왕성한 낙농경영 활동을 하고 있다. 윤여창전창령원목장대표는 낙농 초창기 종축개량선구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지금은 도시계획에 밀려 목장을 그만두고 농협중앙회 전문위원, 한국농업전문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우 분야는 64년부터 4백두 규모의 한우 비육을 시작한 수원목장의 홍석철씨가 꼽힌다. 홍씨는 72년부터 76년까지 거세한 고급 한우육을 생산, 1만두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87년에는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2천두 규모의 옥내 톱밥 발효 우사로 개조하기도 했다. 현재는 둘째 아들 상호씨에게 목장경영을 맡기고 용인 소재 모 병원에서 요양중이다. 다음은 양돈분야. 이미 작고한 윤도진씨가 꼽힌다. 윤도진씨는 현재 대상농장의 전신인 제일농장을 설립함은 물론 가공공장을 설치, 양돈초창기 양돈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너무 앞서가는 투자로 부도 등의 어려움을 당하며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고인이 됐다. 전동룡씨는 동화농산대표로서 양돈협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양돈업계의 수많은 현안을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도 양돈현장에서 일을 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인혁씨는 제일종축 등을 경영하면서 우리 나라 종돈개량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현재는 선진축산회장으로서 단양GGP농장 등을 거느리며 아직도 축산업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김의수씨는 돌산이나 다름없었던 땅에 돌을 걷어내고 해인목장을 설립했다. 70년대후반부터 80년대초반 낙농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해오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양돈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현재의 금돈육종을 일궈놓았다. 지금은 차남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다. 김해 박재근씨는 한국양돈협회와 축산수출사업회가 통합, 대한양돈협회로 출범하면서 회장을 역임했고, 이후에는 부산경남양돈조합을 창립한 다음 초대 조합장으로서 양돈산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말년에는 김해시의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작고했다. 대구의 김창좌씨는 대구경북양돈조합을 창립하고 역시 초대 조합장으로서 양돈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는 아들에게 양돈장을 물려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도의 김상호씨도 빼놓을 수 없는 초창기 양돈산업 발전에 이바지 한 분이다. 아라농장 대표로서 제주의 양돈업계를 선도하며 제주 양돈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현재는 양돈경영을 아들에 맡기고, 양돈 일선에서 물러나 골프등으로 소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유일의 닭육종회사인 (주)한협육종의 초대설립자인 박도현씨는 민간차원에서의 닭육종사업 도입과 성장을 이끌어온 한국양계사의 중추적인 인물. 지난 86년 2세인 박준영씨에게 경영을 맡기면서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으나 92년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문제로 97년부터는 경영에서 은퇴, 지금은 3세 경영인인 박성진씨((주)한협축산대표)와 전문경영인인 장씨((주)한협육종대표)체제가 구축돼 있다. 오봉국씨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재학 시절인 지난 1957년 미국으로부터 육종용 종란 1천3백개 수입을 주선, 상업용 양계산업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양계협회 고문으로서 양계산업 발전의 조언자로서 역할에 나서고 있다. 2001 박람회 추진위원장을 맡아 성공적 행사로 이끄는 등 노년에도 불구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이계조씨는 천호그룹의 창립자로서 한국 육계계열화사업의 대부로 꼽히는 이계조씨는 국내 양계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중의 한명. 천호부화장을 시작으로 종계 사육 가공에 이르는 육계계열화사업으로 90년대초반까지 국내 육계산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친족체제 중심의 방만한 경영 등으로 인해 결국 미원마니커로 인수당하는 아픔을 겪은데다 건강까지 악화, 사실상 양계업을 청산했으며 다만 둘째 아들이 부화기와 약품등의 오퍼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첫째 아들과 며느리를 대한항공 비행기 괌폭발 사고시 잃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강희구씨는 우리나라 협동조합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난 82년 서울경기·양계조합을 설립, 초대 조합장을 시작으로 1∼2대 조합장을 연이어 역임하면서 계란가공공장과 집하장설치는 물론 전국 지역의 양계축협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국내 채란양계산업 발전의 기틀 마련에 큰 공헌을 했다. 조합장 퇴임후 노일선에서의 활동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바른협동조합모임과 협동조합연구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협동조합의 올바른 발전방향 제시에 노력하고 있다. 신홍종씨는 와렌품종을 도입 80년대 중반 한 때 국내 산란계종계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기도 했던 (주)고창양계 설립자로서 양계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는등 국내 채란업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와렌품종의 퇴조와 함께 GP사업과 고창기계 설립 등 사업확장에 따른 경영악화로 지난 90년초 농장경영에서 물러나 지금은 고창기계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