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고급육 개량 토대 마련 2000년대 쇠고기 시장 차별화 역점

2010.10.04 14:55:05

■1985~2010 축산 25년 발자취/ 한우

[축산신문 이동일 기자]
 
1980년대 이전까지는 한우는 산업이라 부를 수 없었다. 지금의 경운기나 트랙터 같은 농기구의 개념이 강했고, 한우가 지금처럼 상품이 된 것은 80년대 이후부터다. 한우의 경제적인 가치가 부각되면서 한우의 개량방향과 사육방법이 변화했고, 내외부 사정으로 인해 산업은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 변화를 겪어왔다. 지금도 한우산업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한우산업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90년대 개량 육량에서 육질로…거세사육농가 등장·육질등급제 도입
한우인 단합으로 생우 수입 저지 성공…’05년 의무자조금 시대 막 올라
투명유통 제도 소비기반 안정 뒷받침…‘생산비 절감’ 한우업계 최대 화두

▶80년대 이전
1950년대는 한우의 증식기로 표현된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6.25를 겪으면서 두수가 급속히 감소해 40만두 미만의 소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축우도살제한법 같은 한우보호대책을 발표하면서 한우두수 늘리기에 매진한 바 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1959년에는 한우가 102만두까지 늘어났다.
1960년대는 한우개량 태동기다.
이 시기에 한우개량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가축의 등록사업, 종축, 후보축, 검사기준 등이 마련됐고, 이때까지 역용우로 활용되던 한우가 육용우로 개량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농협중앙회에 가축인공수정소가 설치되고, 한우등록을 위한 한국종축개량협회 설립과 함께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전국한우챔피온대회가 개최됐다.
1970년대는 한우개량의 혼란기로 보고 있다.
당시 한우개량은 개량의 방향이 양분돼 순종개량과 신품종 개발이라는 두 가지 방향이 공존하게 된다.
특히, 1979년에는 경기 양평 양동, 강원 양양 강현, 충북 청주 오창, 충남 공주 이인, 전북 장수 천천, 전남 고흥 두원, 경북 의성 금성, 경남 울산 상북 등 총 8개 순수한우개량단지와 함께 한우-샤로레교잡 신품종육성단지가 축산시험장과 축협중앙회 공동으로 설치됐다.

▶90년대 이전
한우개량이 순수개량으로 방향을 잡고 빠르게 발전해 나가기 시작하는 시기다.
한우-샤로레교잡 신품종육성과 더불어 순수 한우개량이 초반까지는 이어졌다. 하지만 1983년 순수개량을 위한 한우 후대검정사업에 착수했다.
특히 전국축산진흥대회(현 한우경진대회의 전신)를 통해 선발된 우수종모우들이 인공수정에 직접 이용됐고, 우수 후보종모우는 축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에서 매입해 후대검정을 통해 보증종모우로 선발하기도 했다. 축산진흥대회는 우수정액을 생산하는 종모우의 주요 공급원으로 활용되면서 한우개량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한우개량의 방향이 순수개량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한우개량단지가 확대됐다. 79년 8개소에서 87년 4개소, 88년 20개소, 89년 32개소가 설치돼 총 64개소의 한우개량단지가 조성됐다.

▶90년대
90년대 들어서면서 한우개량은 다시 한번 변화를 맞는다.
이때까지 한우개량의 목표는 단순 생산성 향상, 쉽게 말해 크게 키우는 것에 치중돼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이에 발맞추기 위해 한우는 육량위주의 개량에서 육질에 대한 항목이 추가됐다.
1991년에는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초우회 회원농가들이 국내 최초로 한우 거세를 실시해 본격적인 한우고급육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1992년 육류등급제도가 도입됐다. 당시 등급제는 육질 1, 2, 3 등급, 육량 A, B, C로 지금과 비교하면 단순했다. 하지만 육질에 대한 등급을 매겨 가격에 반영한다는 사실자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임에 틀림없었다. 한우등급제는 이후 2차례의 변화를 거쳐 지금은 육질등급이 1++등급부터 3등급까지 세분화됐다.
한우농가들에게 육질위주 개량과 사양관리를 장려하기 위해 1993년 한우고기평가회가 열렸고, 차기 대회인 1995년부터는 전국한우능력평가대회로 개칭됐다.
하나 주목되는 것은 1995년 지금 시행중인 쇠고기 이력제를 당시에 도입하려했다는 것. 소 전산화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소에 대한 이력을 전산 관리한다는 취지의 상당히 진보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당시의 여건 하에서는 한계가 있어 아쉽게도 1997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97년 한우개량농가 육성사업이 시작됐다. 일부 개량단지에서 이뤄지던 한우개량이 전 한우농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다.
1998년에는 IMF로 한우사육두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한우산업이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99년 9월14일에는 전국한우협회가 창립했다. 대전광역시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이날 창립기념식에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 전국의 한우농가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초대회장으로는 이규석 현 한우협회고문을 선출했다.
농가들이 직접 나서 한우농가의 권익을 보호하고, 한우산업의 미래를 위해 뜻을 모은 단체가 탄생한 것이다.

▶2000년대
이때는 한우산업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초반에는 한우협회가 협회의 사활을 걸고 수입생우와 전면전을 벌이면서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부산, 인천, 정읍 등 수입생우가 들어오는 길목과 입식농장 등 한우농가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입생우 저지를 위해 몸을 던졌다.
2003년 초대 이규석회장을 이어 남호경 현 회장(2,3,4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후 다각적인 사업이 전개되면서 한우산업은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서 국내 쇠고기 시장에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미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이 즉각 금지됐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한우까지 멀리하게 됐다.
이에 협회는 유통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곧 한우를 살리는 길이라고 보고, 이 부분에 협회의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특히, 한우유통을 투명화하겠다는 한우협회의 의지에 따라 한우판매점 인증제를 도입하고, 음식점원산지표시제 도입, 쇠고기 이력제 도입 등의 성과를 거두면서 탄탄한 기초를 다진 시기가 바로 이때다.
또한 2005년 한우의무자조금 시대를 열면서 한우산업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대의원 총회를 통해 거출금 두당 2만원으로 결의하고 모아진 자조금으로 다양한 소비홍보활동 및 농가 교육, 연구개발 등 한우산업의 미래를 위한 사업에 지금도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현장에서는 거세고급육의 가치가 대두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동안 개별농가가 산업을 이끌었지만 이때부터는 조직을 이룬 브랜드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한우브랜드가 나오고 사라지게 된다.
정부에서도 한우산업 발전의 초점을 브랜드활성화에 맞추고 다양한 방향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브랜드의 폭풍이 다소 잠잠해 지면서 최근 들어서는 국제곡물가 인상으로 인한 사료가격 상승 등으로 생산비 절감에 한우업계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이동일 dilee@chuksa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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