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산업계는 제4차 석유파동이 발생한 1984년 하반기에 소 값 파동이 발생했고, 경기가 침체(沈滯)돼 우유소비가 줄어 분유가 남아돌게 되는 등 심각한 실정이어서 1985년 그해 봄에 전지분유 30톤을 대만으로 처녀 수출을 하게 됐다. 물론 적자 수출이며 적자는 축산진흥기금으로 보전(補塡)한다는 전제하에 실시됐다. 그 당시의 실상을 더 자세히 설명 하자면 필자가 미국의 홀스타인 100주년행사 참석 및 낙농산업시찰을 마치고 6월 30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계장이 마중을 나와 하는 말이 오늘 아침 일간신문에 외국에서 수입한 송아지 급여용 대용유사료를 빵 제조공장 및 식품점에서 분유 대신 불법 사용한 것이 적발돼 이로 인해 국산분유의 체화는 더 심각해질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귀국과 동시에 사무실로 직행해 밤을 새우면서 대책을 수립할 만큼 황급한 상황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 해 봄, 4월 하순부터 5월 달까지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농림부에서는 모든 조직을 총동원해 가뭄대책을 추진했으나 가뭄이 심각하다보니 신문과 방송에서는 갈라진 논바닥과 저수지바닥의 사진·영상을 연일 보도했다. 하지만 축산업계 입장에서 보면 무더위로 인한 가뭄에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유제품 판매량이 증가할 것이고 이로 인해 우유체화 해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농림부 회의 자리에서 몇 번인가 농담으로 한 달만 더 가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장관에게 보고가 되었는지, 하루는 현장에 나가려고 현관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장관께서 현관으로 올라오고 계셨다. 나는 “장관님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장관께서 “이 과장 어디를 가는 거야, 이 과장은 가뭄이 더 계속돼야 우유소비가 늘어서 좋다고 더 가물라고 빌고 있다지” 라며 웃으시면서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에 장관께 소금장수와 우산장수 두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의 어려움이 어떠한 것인가를 여쭈어 보고 싶었다. 하여간 축산업계는 소 값 파동에, 우유체화에 돼지 값은 하락해 총체적(總體的)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래서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큰 일이 발생할 우려도 있고, 또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농가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하반기에 2천톤의 전지분유 수출하기로 추가계획을 수립, 한국유가공협회에 의뢰해 분유 수출업무를 추진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미 벨기에로 수출을 하기로 가계약(假契約)을 체결했다. 재고 분유는 국제규격에 맞는 것이 없어서 국제규격에 맞게 분유제조시설을 갖추고 있는 유가공회사별로 할당해 작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분유수출작업을 중단하라는 장관의 지시가 내려졌다. 그 후에 국장, 차관보, 차관이 검토결과를 몇 번이나 장관에게 보고, 설명을 하면서 분유의 수출을 당초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이 최선책이므로 허락해 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장관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씀으로 회의 결론을 내렸다. 물론 축산국장, 차관보, 차관이 같이 참석한 아침회의에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 간부회의가 끝난 후에 장관주재회의에서 분유수출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났다는 상황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뜻밖에도 차관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