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13년 걸려 부가세 영세율 관철” 생산자단체를 이끌어 간다는 건 지역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영세한 생산자가 많고, 생산자단체의 역사 또한 일천해 활동에 많은 제약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그 어려움은 가중된다. 본인이 축산관련단체장으로 활동했던 지난 20년간 한국축산업은 미증유의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만성적인 수급불균형도 문제였지만 UR협상등 대외적 여건변화로 인해 수입개방에 대한 불안감이 극심한 가운데 규모화에 초점을 맞춘 구조개선이 이뤄지는등 혼란이 적지 않았던 시기였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진행되는등 개방이 가시화될 당시 본인은 생산자단체장으로서 개방이후 한국축산업과 중소규모 축산농가의 생존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면서 △대기업의 축산참여제한 △사료 및 축산기자재 부가세영세율적용△자조금법의 기틀 마련에 사활을 걸다시피해야 했다. - 대기업 축산참여제한 입법 대기업의 축산참여 제한문제는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의 참여로 인해 축산농민들이 희망과 의욕을 잃고 있다는 논리로 국회를 설득해야 했다. 대기업의 축산참여는 영세농가의 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기업은 자본과 기술 없이는 하기 힘든 전자, 중화학공업에 주력하는 것이 국가경제발전과 부합한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져 이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의원입법으로 관철되었다. 그러나 대기업의 축산참여 제한입법은 출발단계부터 난항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 축산입국실현이란 정부시책으로 우선지원을 받아온 대기업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리 만무했다. 당시 이를 관철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본인에게 가해진 보복과 일부정치인을 비롯한 몰지각한 인사들의 모함은 참으로 고통, 그 자체였다. 본인은 축산인중 소수라도 이 일을 기억해주리라 믿으며 그때의 일을 인생에서 여러사람을 위한 순수한 봉사였다고 자위하면서 당시의 고통을 잊으려 노력중이다. - 사료 및 기자재 부가세영세율 적용입법 일반 농사용자재와 달리 사료등 기자재에 부가세를 적용하는 것은 형평성도 문제지만 축산업의 경쟁력제고에 많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부가세영세율을 관철하는데는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에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다는 뜻을 지닌 마이동풍이란 속담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본인은 70여명의 국회의원을 만났으며 이들에게 외국의 사례를 직접 접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청원을 했지만 재무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교착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우여곡절 끝에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부가 시행령, 시행규칙제정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영세율적용으로 인해 축산농민은 지금까지 5조원(약 50억달러)의 세부담을 덜게 됐는데 본인은 이를 축산농민이 재벌과 정부, 국회를 상대로 얻어낸 성과란 점에서 프랑스혁명이후 전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로 자평하고 있으며, 아시아 각국과 미국 농민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 축산자조금법 기틀 마련 생산자단체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수 있었던 시절 본인은 미국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 비용을 거출하는 CHECK-OFF제도를 부러워 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도입하기 위해 이를 자조금이라 이름지어 여러차례 법제화를 시도했지만 주무부처의 이해부족과 비협조등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본인은 사비를 들여 뜻을 같이하는 몇몇 관계자 및 국회의원들과 함께 미국을 여러차례 시찰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등의 활동을 통해 농어촌특별법제정시 자조금조항을 반영할수 있었다. 이것이 현재의 자조금법으로 결실을 보게 되어 한국에서도 생산자들이 소비홍보와 조사연구활동을 함으러써 축산발전의 큰획을 긋게 됐다. 본인은 생산자단체장으로서 활동하면서 비록 힘은 들었지만 봉사의 기쁨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점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 사회는 부지런하고, 끈기있게 최선을 다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천리(天理)를 다시한번 음미하며, 봉사란 모름지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