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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90년대 초 계열화사업 통한 대형화·자동화 기능성·부분육 생산 확대…소비자 요구 부응

1985~2010 축산 25년 발자취 / 육계

[축산신문 노금호 기자]
 
■ 현장 양계인에 듣는다 / 갈현농장 이동용 대표

본지 창간 이후 육계산업 25년 그 발자취를 알아보기 위해 그 만한 경력을 가진 육계인을 찾았다. 지난 1979년부터 충남 서산시 성연면에서 육계를 사육하고 있는 이동용 대표(갈현농장)다. 현재 7만5천수 규모의 육계업을 하고 있는 그는 대한양계협회 서산육계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위 사계(일반닭)에서부터 계열회사 닭을 모두 사육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무항생제 닭도 사육하고 있는 참 육계인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산업 발전위한 농가-계열화업체 상생 방안마련 ‘발등의 불’
-육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
“80년대 초에는 지금과 같이 농사가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과수농사를 지으려고 준비를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비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과수를 준비할 비료를 만들기 위해 조그맣게 하우스를 지어 육계를 시작 했다.”

-처음 시작할 때 육계규모와 지금현재는 어떻게 변해 왔나.
“80년 초 만해도 나를 비롯해 모든 육계농가들은 비닐하우스에 보온덮개를 씌워서 닭을 사육했다. 그 당시에는 보온덮개용 하우스가 가장 널리 퍼져 있었다. 누구나 육계를 할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농가당 사육숫자는 적었지만, 농가들은 많았다. 육계 1천수를 현재의 농장에서 시작했다. 중반에는 3만 5천수로 늘려 사육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육계의 호황을 기대하며 사육 규모를 늘렸지만 호황은 커녕 손해를 봐야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후반기에 들어 반무창 계사를 지어 사육하게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90년대에 들어와서 자연재해인 폭설로 피해를 심각하게 입기도 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90년대 후반기에 지었던 반무창 2동과 2004년도에 건립한 무창사 3곳 등 총 5곳에서 지금의 육계업에 임하고 있다.”

-닭고기 거래는 어떻게 이뤄 졌나.
“80년부터 90년 중반까지 일반닭(사계)을 사육했다. 70년대 만해도 사람이 어깨에 저울을 달고 닭의 무게를 달아 거래가 이뤄졌지만, 80년도에는 1톤도 안 되는 차에 나무로 틀을 잡고 철망을 씌워서 어리장을 만들어 사용했다. 처음 닭을 할 때 바로 바로 돈이 나와서 행복할 정도로 좋았다. 피해를 본 사람도 있지만 잘만 키운다면 닭이 돈을 벌어주는 시기였다. 90년도에는 어음이 돌기 시작했다. 계열화업체들이 생기기 전에도 어음이 돌기 시작했으며 96년까지 어음이 돌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남용한 어음 때문에 길게는 2개월까지도 지나 부도가 나버리면 농가들은 돈을 받을 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있었다.

-사료 급여와 급수는 어떻게 이뤄졌으며 환기는 어떻게 변화했나.
“하우스계사에서 사료를 주는 것은 사료포를 손수 들고 다니면서 손으로 뿌려서 줬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이렇게 주는 농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기에 사료회사에서 자기회사 사료를 홍보하고 사료를 독려하기위해서 사료통(벌크)을 세워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이 개인 돈으로 사료통을 설비해야 한다. 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료만이 아닌 물을 어떻게 주는냐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에는 일자급수기를 사용했다. 90년대를 지나 2004년까지 일자급수기를 사용하다 무창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니쁠 급수기로 변경했다. 일자급수기의 단점은 물이 일자로 나오다보니 막히는 공간이 너무 많고 고생은 고생대로 한 것이 생각이 난다. 하지만 지금농장에서도 하우스 계사 등에서는 일자급수기를 사용하는 곳도 많이 있다. 환기시설에서는 80년 초반에는 환기시설이라고 해봤자 하우스 옆을 수동으로 올리는 수준이었다. 옛 육계사에 들어가면 눈이 매울 정도로 탁한 공기가 있었지만 80년대 후반기부터 반무창과 무창이 설비되고 환풍기가 발달함으로써 농가가 방안에서도 농장의 온도, 환기, 습도 등을 체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사양기술의 변화도 많았을 것 같은데.
“80년도에는 출하일령이 50일까지 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육기간이 짧아져 최대 35일에서 최소 30일까지 사육하고 있으며 1.5~1.8kg 정도 되면 출하한다. 80년대 사료 요구율은 사육일수가 길어지는 것을 감안한다면 80년엔 2.2정도 였다. 90년 들어와 계열회사가 생김으로 인해 2.0대까지 내려왔다. 2000년 이후에는 사료요구율이 잘 나오는 곳은 1.5대부터 1.7~1.8대로 낮춰졌다. 계열화가 시작되면서 품종의 개발도 있었지만 지금 농가들의 닭 사육능력이 그 당시보다 높아 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질병을 본다면 80년 당시에는 환기구의 미비로 인해 호흡기 질환이 많이 있었다. 또한 마이코플라즈마, 콕시즘, 괴저성피부염(일명 빠다리병)이 나타났다. 85년부터 90년 중반까지 호흡기성 장염 등이 심각했었다. 90년대에서는 콕시튬의 질병이 한창 유명세를 탔다. 그 후 2000년도에는 종계가 많이 수입됨에 따라 2000년 후반기에는 아데노바이러스(CAV) 등의 신종질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90년도에는 사료에 콕시튬약을 첨가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전기만 첨부하고 후기에는 약이 안들어 간다. 지금은 무항생제 사육으로 항생제가 첨가되지 않는다. 폐사를 보면 80년에는 현재보다 적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80년대와 90년대는 종계장과 부화장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 많이 있어 병아리를 팔아야 하기 때문에 좋지 않으면 농가들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폐사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계열회사가 생기고난 후에는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할 때가 있어 폐사가 많은 편이다. 계열사에서 병아리 숫자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품가치가 높은 병아리를 만드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닭고기 유통은 어땠나.
“80년대 초에는 활발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통닭이라는 것 보다 튀김닭이라고 했다. 80년~90년에는 시장에서 닭을 도계해 팔 정도로 시장상황이 열악 했다. 90대 초반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다 90년대 후반부터 축산물위생법 등 제도가 개선된 후 오늘날에는 포장화가 전면 시행되는 등 많이 개선됐다. 지금은 닭을 함부로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또한 2000년 후반기에는 통닭으로 한 마리씩을 먹는 것이 아닌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먹는 부분육 시장으로 확대 돼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계열화사육이 본격화 되면서 달라진 점이라면.
“90년대 초반에 계열화가 시작됐다. 계열화가 없었을 때는 실패해도 농가책임 성공해도 농가책임이었다. 하지만 계열화가 시작되고부터 농가들은 득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계열회사가 더 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농가들이 많다.”

-앞으로의 변화는.
“계열회사에서 농가에 대한 배려를 해주지 않는다면 농가들의 전망은 어둡다고 본다. 사료효율도 2.0대에서 1.7과 1.5대를 요구하고 있으며, 계열회사에서 자기 닭이라고 한다면 농가에 대한 상차비나 깔짚비 등 계열회사에서 농가에 맞춰줘야 한다. 농가들은 계분만 처리하는데도 150만원이 들어가고 있다. 이는 정부에서도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계열사와 농가들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하루빨리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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