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농협대학교 총장)
▶ 순례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 6월 7일, 16일차 )
어느새 16일차, 이제 중간을 넘어섰다. 처음엔 힘들더니 이제 힘든 줄도 모르겠다. 몸이 이제 매일 걷는 것으로 알고 적응이 된 모양이다. 참 신기한 게 사람의 몸인 것 같다. 그러나 몸만의 적응은 분명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정신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 같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이정도의 운동량이라면 한국에서 같으면 벌써 입술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고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은 괜찮다. 처음 나흘째에 입술 안쪽이 약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는데 잠을 자고나니 말짱해졌다. 정신적인 긴장감을 알아차리고 몸이 비상적인 적응력을 발휘한 게 아닌가 싶다.
물집이 잡혔던 발가락도 다 아물었고, 부르트기 직전까지 갔던 발바닥도 이제 굳은살로 변했다. 사실 지리산 종주나 설악산 등반처럼 정해진 일정도 아니고 매일 25~35km를 걸어야 하니, 나의 정신적 육체적 긴장감은 생애 최고수준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집안과 지인들에게 산티아고 까미노 850km를 걷겠다고 공언했는데 완주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자존심 스트레스까지 겹쳐진 것이니, 그 부담감이란 대단히 컸다. 또 동행하는 친구에게 폐만 끼치고 부담만 잔뜩 주는 게 아닌가하는 걱정도 있었다. 지리산을 오르는 수준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독려해준 친구를 실망시키지는 말아야 할 텐데 하는 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부담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도에 포기한 일이 없는데 내 일생에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나의 자존심과의 싸움이 되어버린 모양새였다. 다행히 떠나기 전 부터 우려했던 오른쪽 무릎이 이상 없이 버텨주니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 약 한 달 가량 사전준비 산행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마지막 마무리는 한라산 등산, 13km 정도의 코스였는데 무리 없이 해낸 것이 자신감을 갖게 했다.
아침 7시 10분에 출발, 한 40 분 정도 갔을 때 십자가 지붕이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공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아서 무언가 궁금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건물을 짓고 가운데 벽에 십자가 고상을 모시고 왼쪽에 성모마리아를 모신 성소(聖所)였다. 한쪽에는 순례자들의 이름과 서명을 적을 수 있도록 방명록도 비치돼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보았는데 그 때마다 문이 잠겨있어서 몰랐는데 오늘에야 의문이 풀렸다.
이런 성소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처이기도 하지만, 순례자들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성소를 깔끔하게 관리하고 문을 열어둔 그들의 속 깊은 배려에 감사한다. 여기에다 중간에 쉬어가라고 벤치도 놓아주고 물도 마련해주고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부엔 까미노!’ 또는 ‘아우빠(Aupa)!’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사의 모습과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아우빠’는 우리들이 외치는 ‘파이팅’처럼 힘내라는 뜻이다.
가톨릭 신자가 80%가 넘는 스페인에서는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자에 대한 지원과 배려는 절대적이다. 정부는 순례길이 손상되지 않고 잘 유지될 수 있도록 구간마다 관리 책임자를 두어서 관리하고 순례자들이 길을 놓치지 않도록 표지(노란색 화살표와 가리비조개표시)를 유지·관리한다.
숙박 편의를 위해서 지방정부가 공공(municipal) 알베르게를 운영한다. 규모는 침대수로 알 수 있는데 큰 곳은 산티아고에 있는 세미나리요(Seminario) 알베르게 처럼 300명까지 수용하는 곳도 있지만 통상 40~60명 수용규모가 가장 일반적이다. 하루 숙박비용은 통상 6~8유로로 저렴하다. 공공기관건물, 수도원, 교회의 부속건물, 등을 리모델링해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직영하는 곳은 도네이션 방식으로 알아서 기부금을 내면 된다. 조리시설이 있어서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전자레인지와 냉장고만 있는 곳도 있으므로 사전에 확인하는 게 좋다.
공공 알베르게 이외에 민간 알베르게가 있어서 넘치는 순례자를 받아준다. 통상 민간 알베르게는 10~15유로를 받으므로 사전에 꼼꼼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민간 알베르게는 개인 주택을 개조한 곳이 많으며 규모에 비해 침대 수를 너무 많이 넣어서 비좁고 복잡한 곳이 많다. 가격도 좀 비싸다. 물론 반대로 아주 시설이 잘 돼있고 깔끔한 민간 알베르게도 있다.
쉬지 않고 두 시간, 9km를 가도 카페 하나가 없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사과하나 입에 물고 출발했는데 무슨 길이 계속 오르막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큰 산을 하나 넘어야 목적지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가도 가도 계속 오르막, 힘이 들지만 멈출 수는 없는 일. 계속 올라가는 길 6km를 걸어서 산을 넘어가는 고개에 이르니 지명이 라깜빠(La Campa), 꼭대기라는 뜻이다. 이정표를 보니 해발 450m, 강원도 미시령 옛길을 걸어서 넘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을 때는 좋은 요령이 있다. 군대식으로 구령을 붙이거나 행진곡조의 노래를 부르면 힘이 훨씬 덜 든다. 군대에서 구령을 붙이면서 단체로 뛰면 혼자 뛰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든다. 힘든 농사일을 할 때 농요를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렵게 고개를 넘어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꿀맛이다. 오늘도 30km를 걸어서 폴라데씨에로(Pola de Siero)에 당도해 주립 알베르게에 안착했다.
축산신문, CHUKSAN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