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성 식 교수(연세대학교)
요즘 실감이 날 정도로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나이 때문인가. 늦가을에 느끼는 고즈넉한 정취도 조만간 깊은 동면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게다.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법칙이겠지만 우리의 인생도 산업도 계절처럼 순환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면 좀 철이 들은 까닭이다. 돌이켜 보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장이 시작된 국내 유가공산업은 한창 좋은 시절이 있었다. 20년 전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 통계 수치가 좋았다. 경기가 좋으니 장래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4계절 중에 어디쯤에 서 있을까.
생산량 소폭 증가…수입 비중 매년 20% 이상↑
백색시유 보다 가공유 개발 주력, 세계적 추세
중국·할랄시장 선점 노력…동물복지도 눈 돌려야
원유 230만 톤.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생산되는 우유의 총량이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총소비량 350만 톤 중에서 어림잡아 230만 톤이 국내산이니 120만 톤은 해외에서 수입해 먹고 사는 셈이다. 사실 국내 유가공업체 수는 이웃 일본에 비하면 너무나 많다. 서울우유(협)를 비롯한 6개 가공조합 외에도 대략 20여개에 달하는 사기업들이 있다. 낙농여건이 제한된 비좁은 땅에서 이처럼 여러 업체들이 난립하였으니 그만큼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유 소비량, ’12년 이후 매년 뒷걸음
최근 통계를 보면 1인당 우유소비량이 연간 75kg(2015년)이나 되지만, 국내산 우유를 소비하는 지표인 시유소비량은 2012년 28.1Kg에서 매년 조금씩 뒷걸음치고 있다. 시유소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우유소비량이 감소하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청소년 인구절벽 현상과 안티우유선동(anti-milk campaign)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안티우유선동자들은 우유가 식품으로서 차지하는 절대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소젖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교육방송이 방영한 안티우유프로그램이었다. 그들의 활동은 더욱 거세질 것이고 우리의 인식 속에 박혀있던 우유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면 날개가 없을 것이다.
낙농업계가 안티우유선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건 2~3년전에 불과하다. IDF한국위원회 등이 우유사랑포럼(milk science forum)을 결성하여 우유의 과학적 진실을 홍보하고 있다. 휴대폰 앱(App) ‘우유114’를 제작해 그들의 집요하고 자극적인 선동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유나 고기 같은 축산물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의심받고 있던 차에 지난 9월 한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고지방식품으로 체중감량에 성공한 사례가 소개됐다.
개인이 섭취하는 총열량 중에서 탄수화물 5~10%, 단백질 20~25%, 지방 70~75%을 차지하는 육류와 버터, 치즈 등으로 구성된 식단으로 체중감량이 가능하다는 주장. 이는 영양학 교과서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식단의 비율에서 지방이 탄수화물의 자리를 차지한 어쩌면 황당한 주장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방송 이후 소비자들의 인식 속에 비만의 주범으로 여겨왔던 고지방식품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고지방식품의 매출이 증가했고, 국내산 버터는 품귀현상이 발생하였다는 소문이다. 그 식단의 의학적, 영양학적 진실은 논란의 여지가 많아 지면상 생략하겠지만, 세간에 떠돌던 유지방(milkfat)이 비만을 유발한다는 나쁜 인식도 이 방송을 계기로 상당히 해소되었으니 유가공업계로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산 유질 경쟁력 손색없어
현재 상태로 평가한다면 국내산 우유의 품질은 매우 우수하다. 체세포 20만 미만의 1등급 비율이 58%를 넘어섰고, 세균수도 3만 미만인 1A등급이 무려 92%에 이른다. 유지율도 2000년 이후 조금씩 증가하여 금년에는 3.8~3.9% 범위였다. 이렇듯 국내 우유의 품질은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렇지만 국내 우유제품 생산현황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백색시유생산량은 2003년 182만8천 톤을 정점으로 매년 생산량이 줄어 2015년도에는 하루 평균 4천400톤으로 연간 160만톤 생산에 그쳤다. 발효유마저도 1997년 이후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그나마 소비량이 늘어나는 치즈의 경우에는 2014년 국내생산 2만5천톤, 수입은 약 9만톤이었다.
국내 생산은 소폭 증가했지만 수입비중은 매년 20% 이상 증가하는 추세이다. 지난달 지불된 농가원유수취가격은 1천74원이었다. 이처럼 높은 원유가격 때문에 유제품 소비부진이 심화된다는 목소리가 크다. 업계에서 보고한 바에 의하면, 2015년 말 분유재고량이 약 2만여 톤에 육박하였으나 그간 낙농가들이 각고의 도태, 생산 감축을 단행하여 다행스럽게도 2016년 말에는 1만 톤 정도로 감소했다. 그러나 원유수급불균형 문제는 항상 낙농산업의 고질병이어서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시유소비 정체는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정체현상은 산업의 틀(paradigm)을 과감하게 깨지 않는 한 한동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 유제품 최대 수요처 부상
FAO에서 보고한 세계의 유제품 현황을 잠깐 살펴보자.
지난 30년간 세계 우유생산량은 50% 증가하여 2013년 7억6천900만 톤이 생산됐다.
인도는 전 세계 우유생산량의 18%를 차지하는 최대 생산국이고 미국, 중국, 파키스탄, 브라질 순이다. 우유가 남는 잉여국가는 뉴질랜드,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 아일랜드 등이고, 반대로 우유 과부족국가는 중국, 이탈리아, 러시아, 멕시코, 알제리와, 인도네시아 등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아시아 지역은 세계 수입시장의 55%, 아프리카 지역은 15%를 점유하므로 이지역이 유제품의 가장 큰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멕시코 등 라틴아메리카, 카리비안(Caribbean) 국가들은 특히 분유소비량 증가가 기대된다. 유제품의 교역은 공급량의 제약 때문에 2013년 현재 0.9% 감소한 5천300만 톤에 이를 것이다. 이점은 과거 4년 평균 7% 증가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유제품의 수요가 중국, 이란, 싱가포르, 파키스탄, 아랍에미레이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에서 상당히 생길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비싼 국제 유제품 가격 때문에 전체적으로 수입량이 감소할 수 있다. 러시아는 버터, 탈지분유 수요가 많아 수입량이 늘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 유가공 신제품으로 눈을 돌리면, 백색시유보다는 가공유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세계 최대의 유가공회사인 네슬레(Nestle)사는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브랜드 네스퀵(Nesquick) 제품에 단백질이 보강된 가공유를 출시했다. 미국 Fairlife사도 10대나 젊은이들을 겨냥한 저 설탕 YUP우유(ultra-filtered flavored milk)를 개발했다. 이 저설탕 제품은 대체감미료 acesulfame K와 sucralose, 유당의 소화를 돕는 락타아제를 첨가한 제품이다. 환경을 고려한 제품들도 눈길을 끈다.
펜실베니아주에 소재한 Rutter’s Dairy사는 삐유전자재조합(non-GMO) 유기농 우유제품을 개발하여 팔고 있고, 칼립소식품(Kalypso Foods)이 생산하는 그릭요구르트는 용기와 뚜껑이 모두 재활용이 가능한 토기(terra-cotta pot)로 바꾸면서 친환경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다.
최근 국내외 아이스크림 회사들은 녹차(tea)를 우려낸 추출액을 사용함으로써 건강기능성을 주장하는 제품을 개발했다. Lifeway Foods사는 단백질이 보강된 케피어(protein kefir)라는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운동 후 근육회복에 좋은 식품이라는 맞춤형 제품의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별히 단백질이 보강된 저설탕 유기농우유(organic milk)의 판매가 늘어나고 있다.
우유소비 시장에서 나타난 조그만 트렌드는 전지우유제품에 향미를 보강한 제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저지방우유(lowfat milk) 제품에 주력하고 있는 국내 시유업체들이 참고해야 할 시사점이다.
한국, 원유생산비 세계서 가장 비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내 낙농산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어려운 현실과 마주하는 형국이다. 최근 극심한 우유소비 부진에 따른 잉여유 문제, 다자간 FTA체결에 따른 시장개방, TRQ 물량으로 인한 수입유제품의 증가, 다양한 집유 주체들이 보유한 현행 쿼터제 문제 등 참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가 수두룩하다.
국내 낙농은 인프라가 취약하고, 23%에 불과한 사료자급률 때문에 원유생산비가 세계적으로 가장 비싸다. 국내 유가공업계는 원유 kg당 1천원이 넘는 농가수취가격으로는 국제는 물론 심지어 국내시장에서도 결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용도별 유가차등제가 그래서 더 절실하다. 게다가 2013년부터 시행된 유가연동제는 우유생산비에 따른 산출공식으로 유대를 계산함으로써 그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됐다.
낙농업계는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이겠지만 차세대 낙농산업을 위해 우유가격결정체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국산 우유의 소비확대에 기여했던 학교우유급식제도도 불원간 닥쳐올 청소년층 인구절벽과 늘어나는 노인층을 고려한 새로운 급식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처럼 홀스타인종(Holstein)에 의존하는 우유 생산도 유지방, 유단백질 함량이 높은 저지종(Jersey) 유우로 교체하는 노력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대규모 축산단지 조성사업과 연계된 가축분뇨퇴비화사업도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결코 낙농생산성을 제고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이 산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소비 정체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에서 블루오션을 찾아야 하고, 중국이나 할랄(halal) 시장개척에 업계가 먼저 앞장서야 한다.
요즘 EU 국가를 중심으로 동물복지 기준이 강화되고 있고 국내 대형 유통·식품제조업체에서도 동물복지형 축산물거래가 확대되는 추세이므로 낙농산업도 우선 동물복지 시설을 확충하는 액션플랜을 짜야한다. 가격만이 아니라 대중의 니즈와 니즈를 연결하는 매칭(matching) 시장이 미래의 시장이다. 유가공업계는 소비자의 니즈에 맞는 유제품의 연구개발과 친환경적으로 우유와 유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