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식 교수(연세대학교)
필자는 지난 60년대에 지방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소위 ‘보릿고개’로 지칭되는 이 땅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축산업을 장려하던 때쯤 일게다. 주변에는 농사와 어업으로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는 참으로 가난했던 가구들이 많았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특권처럼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들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가면 가끔 노르스름한 분유를 양은도시락에 퍼 주거나, 옥수수 가루를 가마솥에 쪄서 학생들에게 배급하곤 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출출하면 한웅큼 입에 털어 넣었던 분유가 목구멍을 막아 허둥대던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우유라는 식품은 우리사회에 그렇게 소개되었고 부유한 미국사람들이 먹는 비싸고 귀한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깡통에 들어있는 미제 버터를 밥에 비벼먹을 때,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렇게 먹었던 분유, 유제품이 미국인이 먹고 남는 잉여우유를 연방정부가 유가공업체로부터 구입하여 저개발국에 원조의 형식으로 제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대학교수가 되고 난 후였다. 원유를 가공업자에게 팔아야 생계를 유지하는 낙농가도 보호하고, 한편으로 목장에서 구입한 원유를 시유로 가공하는 유가공업체의 도산을 막는 지원수단이었다. 연방정부는 분유를 구입하여 가난한 나라에게 지원하였으니 목장의 생산과 가공업체의 상생을 도모하는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유즙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4천여 포유동물에게는 공통적인 생존의 테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영양분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는 완전한 자연식품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식품의 가치는 함유된 고른 영양소의 함량뿐만 아니라 각 영양소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화·흡수되는가에 따라 그 영양학적 가치가 좌우된다. 어미는 새끼를 임신하고 있는 기간보다도 분만 후 갓 태어난 새끼를 잃어버리지 않고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종족을 보존하는 임무의 알파요 오메가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미젖의 영양소 함량이 새끼의 영양학적 요구에 상응할 수 있도록 최적의 영양성분과 면역조절인자를 함유하도록 생산 분비하는 것이다. 최근 모유 올리고당의 기능을 비롯하여 유성분의 놀라운 신비가 차츰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쾌거에도 불구하고 몇 해 전부터 국제적 동물보호단체,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우유 무용론 또는 유해론이 만연하면서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프랑스에서 발간된 ‘우유를 마시지 마라’는 책이 ‘우유의 역습’이라는 혐오스런 제목을 달고 국내 대학의 식품관련 전공교수들에게 무상으로 배포되는 용의주도함까지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일을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펼친단 말인가? 인류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 인류의 대표적인 식품으로 이용된 것이 우유, 고기, 쌀, 밀 등이 아닌가? 이들 식품 중에서 유독 우유만이 암을 유발하거나 성인병의 원흉이라는 우유거부(anti-milk)운동이 과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10월 스웨덴 웁살라대학 칼 미켈손(Karl Michaelsson) 교수 등이 영국 저널지에 발표한 논문이 국내 언론에 소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해당 논문의 제목은 ‘우유 섭취와 남성, 여성의 사망 및 골절 위험: 코호트 연구’이다. 이 연구는 스웨덴 39-74세 여성 61,433명, 45-79세 남성 45,339명을 대상으로 추적 조사한 것이다. 나이, 에너지 섭취량, 체질량지수, 흡연 등 여러 변수를 보정하여 우유 섭취량에 따른 사망률과 골절률을 조사한 결과, 1일 우유 700g이상 섭취한 여성은 200g 이하 섭취한 여성보다 사망률이 93% 높았으며, 골반 골절률도 16% 증가하였고, 남성의 경우에도 사망률 10%, 골절률 1% 증가함을 관찰하였다는 내용이다. 저자들은 다량의 우유 섭취가 사망률과 골절률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은 유당 내 갈락토오스(galactose)에 의한 노화 반응일 것으로 가정하였다. 산화적 스트레스 지표물질인 urine 8-iso-PGF2α(프로스타글란딘)과 염증지표인 인터류킨(interleukin-6)과 우유 섭취 간에 양의 상관관계가 관찰되었다고 보고하였다.
필자는 지난 2007년 스웨덴과 지근거리에 있는 오슬로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그들은 왜 우유를 많이 섭취하는지 궁금했다. 겨울이 길고 추운 북유럽 주민들에게는 귀한 채소대신 우유는 칼슘과 에너지를 보충하는 매우 중요한 식품이지만 일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 우유를 많이 먹어도 호르몬, 비타민의 부족으로 체내 흡수율이 떨어진다는 현지 학자의 의견을 들은 바 있다.
축산물바로알리기연구회(위원장 최윤제 서울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위 스웨덴 학자들의 연구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우유 섭취와 사망률 및 골반 골절률 증가와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하였으며, 둘째로 우유 내 갈락토오스가 인체에 산화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어 저자들이 제시하는 작용기전을 납득하기 어렵고, 셋째로 문답식으로 진행된 추적 조사에서는 사망률 및 골반 골절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식습관, 생활습관 및 환경을 완벽히 통제하기 어려우며, 교란인자들을 보정한 분석모델도 우유섭취에 의한 영향만을 반영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본 논문의 저자들도 “이 연구는 근본적인 교란인자와 반인과현상이 게재된 관찰연구이므로 신중한 결과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언론은 이 논문을 인용하면서 <하루 우유 세 잔 이상, 女 조기사망 2배 증가한다고?>를 포함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해당 논문의 학술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경쟁적으로 우유에대한 왜곡 기사를 퍼 나르기에 바빴다.
가령 어느 외국 학자가 우리의 주식인 쌀이 발암식품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다고 치자. 그들의 논문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여과 없이 대중 매체에 공개해야 할까? 아무리 우리 사회가 동물성 식품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는 포식시대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일부 학자의 근거 없는 편협한 주장을 웰빙시대의 중요한 건강정보인양 왜곡하는 사람들과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낚시성 기사를 접할 때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국내 언론들 도대체 왜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