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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기연과 유서 깊은 한국 메가팜의 역사

  • 등록 2018.06.07 10:41:21


김 동 균 이사장((전) 상지대 교수, 강원도농산어촌미래연구소)


살아 온 세월이 좀 쌓인 사람이라면 ‘살아갈수록 알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치고 자신의 삶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떠한 형태로 전개될 것인지를 미리 아는 사람은 없다. 전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인연이 찾아와 소위 ‘팔자’를 크게 굴절시켜 자신의 미래가 전개되었으며, 무난하게 지낼 것으로 기대했던 기간 중에 묘한 변수가 작용해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까지 가 보아야 안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기연(奇緣)의 연속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시에 한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인생스토리는 이승에 흐르는 수많은 사연 중 극히 일부만 자신의 인생역사에 남겨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실상 아무리 다양한 체험을 해 보려고 욕심을 내도 어느 한 사람이 겪고 가는 세계는 자기에게 특정된 아주 좁은 영역에 불과하다.
축산과 인연 맺은 사람이 매우 많은 것 같아도 비율로 치면 극히 제한된 사람들이 이 세계를 움직여 왔다. 누구는 길게 그리고 또 누구는 짧게 인연을 맺다가 가는데 평생 축산인으로 살다가 간 족적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다. 아마 축산신문에 오래 근무한 사람은 평생 축산소식이 몸에 배어 있고 그 영역을 떠나서는 살아가기 어려울 만큼 자기화 되어 있을 것이지만 이 신문을 애독하는 사람들 역시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필자가 축산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도 기연이려니와 학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기연이며 특히 낙농, 축산시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기연이었다. 대학진학 당시 주변에서는 의학을 하던지 공학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선고(先考)께서는 우리나라의 축산이 할 일이 많으니 그 분야를 지원해보라는 조언을 주셨다. 이것이 첫 번째 인연이었으며,  대학졸업 무렵 우리나라 낙농학의 태두셨던 윤희섭 학장께서 조교로 남으라는 명령을 내려 꼼짝 못하고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인연이었고,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우연히(?) 만나게 된 우산(牛山) 최선준(崔善駿) 선생이 세 번째 큰 인연이었다. 이 세 번의 기연이 필자가 평생 축산계에 머물며 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가더라도 특정인의 족적을 오래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 맺었던 인연이었지만 우산선생의 족적은 기억해 두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아주 우연한 첫 만남에 여러 질문하시더니 일반 직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영어로 자신의 사업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면서 사흘 후부터 출근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색채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우산선생이 작고하신지 어언 10년이 지났으나 최근 한국 조사료 관리체계의 발전에 기밀식 탑형사일로가 이용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그 분의 족적을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는 호불호에 따라 여러 측면이 거론되지만 일단 이승을 떠난 사람에게는 좋았던 기억이 우선한다.
필자가 우산선생과 인연을 맺은 1974년 당시의 한국축산은 현대화를 향한 태동기나 다름없는 시기로서 정부는 ‘축산입국’이라는 기치를 걸고 축산현대화에 매진하던 때였는데 한편에서는 재벌들이 자산을 활용하려고 토지를 대량 확보했다. 그러자 정부는 이른바 ‘공한지세’를 발동해 재벌들이 땅 투기를 목적으로 토지를 구입해 놀리는 곳(=공한지)에 상상하기 어려운 세금을 부과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자 재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너도 나도 생산성이 있는 토지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넓은 땅을 생산성 있게 쓰려면 가장 쉬운 방법이 목장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으로 전국에는 8곳의 초대형 목장들이 조성되었으니 이들을 메가팜으로 본다면 한국의 메가팜 역사는 무려 45년째로 접어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메가팜 조성 역사는 오늘날 메가팜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보다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앞섰음을 의미한다.
  메가팜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광활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조사료의 생산, 수확, 보존 및 급여방법의 합리화 문제이다. 나아가 그 영양자원을 효과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가축사육환경의 조성과 우유의 수확(착유) 시스템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회고해 보니 우산선생은 그 모든 체계에 대한 선구적 안목을 지녔던 듯하다.
필자는 출근을 시작한 첫 2개월 동안 회사에 보물 같이 축적된 다양한 정보자료들을 공부하기에 바빴다. 당시 그 회사는 서울역앞 축산회관 2층을 쓰고 있었는데 전 세계의 농기계, 사일로시스템, 목장설계 및 경영방법, 젖소사육기술, 그리고 착유설비 등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으나 이를 종합하는 전문가를 만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 자료들을 구하려고 우산선생은 매년 몇 달씩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앞서가는 산업기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주소를 일러주어 우편물이 날아오도록 조치하는 일을 반복했는데 요즘같이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오직 우편물로만 정보를 접하고 분석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우산선생은 국내외에 다양한 인맥을 가지고 계셨다. 1974년 가을 필자가 속해있던 회사는, 한국정부와 수십 곳의 외국회사 그리고 한국의 재벌그룹을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면서 정책수립을 도왔으며(당시 김강식 축산국장께서 수고를 많이 하셨다), 마지막 달은 정부자금 지원 상환능력 심사준비를 하느라고 필자는 40일간 집에도 들어가 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업이 성사되어 한국에는 13기의 기밀사일로가 한꺼번에 도입·설치되었으나 그 후 기술지원체제가 미비해 그 좋은 설비들이 애물단지로 전락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설비는 현대적 개념의 메가팜에서 핵심요소이다. 이제 다시 한 세대가 지나면서 기계설비도 발전되었고 응용기술도 진보되어 이를 활용하려는 바람이 이 땅에 부는 것은, 마치 반세기 전에 ‘보잉 707’이 개발된 후 오늘날 신기종들이 세계하늘을 날고 있는 이치와 같은 것인데, 우리 땅에서 그 성과가 크게 피어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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