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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

윤 희 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14)

전문지식 체계화·정보공유…산업발전 ‘견인차’

  • 1 1
  • 등록 2010.12.15 09:26:37
[축산신문 1 기자]
 

열네번째 이야기 양돈연구회 태동과 협회 활동(상)

’76년 필자 등 발기인 15명 주축 ‘양돈실무자동호회’로 출발
세미나·심포지엄 등 활발…전문가 그룹 구심체 맥 이어가


’70년대 양돈업계에는 사람도 많지 않고 책, 잡지 등 자료도 별로 없어 전문지식이나 정보 등 모든 것이 궁금하고 아쉬운 시절이었다. 우리 업계를 떠난지는 오래되었지만 이규은씨(마니육종 상무 역임)가 주로 연락을 했던 것 같고 ’76년 3월 6일 ‘한국양돈실무자 동호회" 란 이름의 모임이 이규은, 연정웅, 윤희진, 홍문표, 이원씨 등 15명의 발기인으로 출범했다.
목적은 친목과 양돈기술경영에 관한 연찰, 정보 교류를 통한 자질 향상 및 양돈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해 5월 16일 초대회장에 한백용(2000 GGP 대표, 대한양돈협회 전무 역임)씨, 부회장에 이규은씨를 각각 선출하고 격월로 1박 2일 정례회 및 세미나 모임을 가졌다. 공부가 끝나면 뒤풀이(?)가 이어져 마지막엔 한 회장이 돈을 모두 따서 경비에 쓰곤 했는데 여러 재주가 많고 좌중을 휘어잡는 장기가 있었다. 가족들도 으레 그 모임에 가면 1박을 하고 오는 것으로 양해했다.
제일종축농장 이예혁씨를 거쳐 ’79년 3월 1일부터 필자가 세번째 회장을 맡았고 그 다음은 정영철, 이근홍(캐나다 거주), 홍문표 사장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필자가 회장을 맡은 동안 ’80년 10월 10일 여의도 전경련회관 3층 국제회의장에서 ‘80년대 한국양돈의 발전 방향" 이란 주제로 제1회 전국양돈세미나를 시작하게 됐다. 강사로는 당시 ㈜제일농장 윤도진 사장, 중앙대 김성훈 교수 등이 나왔는데 국제 회의장 아래 위층을 꽉 채울 정도로 전국에서 많은 양돈인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다. 필자 역시 초보수준이지만 시설자동화에 대해 발표를 하기도 했다.
’83년에는 필자의 친구이기도 한 대만 立大農畜의 王汝准 사장이 강사로 오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발표했으며 ’76년 3월~’87년 3월까지 세미나 자료를 묶은 ‘실무양돈"을 9권 29호까지 발간했다. 가끔 정책 심포지엄을 열어 정부에 정책 건의를 하기도 했고 세미나와 함께 기자재 전시회도 열었는데 광고비는 연구회의 운영비 조달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83년 10월 건국대에서 개최하려던 세미나가 정국 불안으로 집회 허가가 나지 않아 부득이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에서 전시회를 하던 도중 아웅산테러 뉴스를 듣기도 했다.
’86년에는 전남 광주지역에서부터 제1회 지역양돈세미나를 시작하여, ’87년 대구를 거쳐 ’88년 부산에서는 제7회 ‘2000년대 양돈정책"을 주제로 당시 농림부 이인형 중소가축과장, 정치평론가 홍사덕씨 등이 강사로 초빙됐고 ’90년 세미나에서는 한창 거론되던 UR 대책에 신구범 축산국장이(당시 회장 황금영), ’91년에는 일본에서 이코마 선생이 나오기도 했다(회장 윤덕영).
하여간 양돈연구회는 늘 전문가 그룹의 구심점이었고 필자 역시 웬만큼 급한 일이 아니고선 연구회 일이라면 열심히 쫓아다녔다. 대한양돈협회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더 그러했을 것이다.
’87년 11월 (주)양돈연구사를 설립하고 ‘월간 양돈연구" 창간을 논의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얼마전 작고하신 전동용 양돈협회장께서 한백용 당시 협회 전무를 앞세우고 오셔서는 ‘월간양돈"이 나오고 있으니 발간작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외에 홍문표 회원이 부산 박철곤씨(부경양돈조합장 역임)와 함께 이인혁 부회장(제일종축 대표)을 양돈협회장으로 밀었다가 쫓겨난 일도 있고 반기업양돈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젊은 친구들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다.
하여간 연구회 멤버 중에 한백용씨나 황금영씨 같은 적극적이고 리더십 있는 회원들이 많았는데 그 분이 너무 욕심이 많았는지 17년씩이나 장기집권 하는 바람에 전문가 그룹을 협회 발전에 활용하지 못한 점은 참으로 아쉽다.
’90년 말께에는 양돈회관 주식 매집건 등으로 양돈협회 지도부 정관희 대리(현 대전일보 서산지국장 겸 본사 편집 부국장) 등이 전 회장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다가 서초 경찰서에 구속된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명절이 다가오니 울고불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마음에 몇 사람이(해인농장 김의수 회장께서 소개하는)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수임료가 높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마침 당시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조영래 변호사와 용케 연결이 되어 황금영, 정영철, 그리고 필자까지 셋이서 500만원을 만들어 찾아갔더니 그분은 우리보고 나쁘다고 했다. “구멍가게 협회장도 10년이면 썩는데 왜 그리 오래 하게 하느냐"(우리가 시킨 것도 아닌데…)는 것이었다. 정관희 대리는 다음날 바로 풀려났고 지금도 가끔 소식을 전해오는데, 조 변호사는 ’90년 폐암으로 요절하여 안타깝게 만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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