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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

윤 희 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17)

아파트 단지 돌며 판로개척 시작…수출신화까지

  • 1 1
  • 등록 2010.12.30 10:39:14
[축산신문 1 기자]
 
- 1998년 냉장육에 이어 국내 최초로 일본에 지육 수출. 오른쪽 세번째가 이범호 사장.

열일곱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중)

“동태와 생태차이 아시죠” 자나 깨나 소비자 설득 ‘온힘’
냉장육시대 본격화·국내산 돈육 대외경쟁력 제고 계기


‘도드람 포크’ 위대한 탄생
회원들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우리보다 10년쯤 먼저 시작한 일본 최고의 양돈그룹인 GPF(글로벌 피그 팜)과 사이보꾸에도 가보고, 양돈 계열화 모델을 찾기 위하여 미국 동부의 카길 계열화 농장, 샌드 라이브스톡 등을 방문하였다. 또 하노버 VIV-EUROPE(지금은 EURO-TIER) 가는 길에 네덜란드의 HENDRIX 사료·종돈회사, CAWI 기자재, 동물복지 양돈장 등을 두루 둘러보았다.
’92년 우리회사 민동수(현 대표이사)가 연수 다녀온 바네벨트 대학(PTC+)에도 가보고 우리도 양돈연수원을 하자고 다짐했고 실제 ’96년 3월 이천에 도드람 양돈 연수원을 설립했다. 당시 사료빈은 모두 사료회사들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우리는 제돈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힘을 모으자’는 슬로건 아래 뭉치자고 했고 일본에 수출하자고 역설했다. 모두 신나게 일했다.
KBS TV에서 1시간짜리 도드람 소개 프로가 나갔고, 이때의 차형훈 PD(한경WOW TV 사장 역임)도 도드람 팬이 되었다. 농림부에서도 적극 밀어주고 축산국 간부들에게 도드람 소개 강의까지 하게 해 주었다.
’93년 1월부터 김홍표가 개발한 ‘DATA PIG’ 전산자료가 집계되어 회원농장끼리 번식 성적 비교가 되고 매월 등수가 나오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9년 도드람 65농가 중 상위 30%, 17농가 평균 PSY 24.7두)
’92년 11월에는 도드람유통㈜를 설립, 그 당시 고기 유통의 메카라고 불리던 서울 마장동 지하에서 조그만 작업장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돼지고기 부위를 속여 파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는데, 곧이 곧대로 하다 보니 두 달 만에 자본금 5천만원을 거의 날리게 되었다. 판로가 없어 500g 포장육을 만들어 이범호씨가 살던 둔촌동 아파트 단지를 돌며 내외가 시식행사를 벌이고, 주문 받아 밤에 배달하는 그런 식이었다. 입소문이 퍼져 단지 내 대형 슈퍼에 처음으로 입점하게 되었다. 1년쯤 지나 다행히 정부로부터 양돈계열화 자금 지원을 받아 이천소재 신영도축장내에 제대로 된 가공장을 마련하여 ’93년 4월 ‘도드람 포크’를 출시하고 롯데백화점에 입점하게 되었는데, 크린포크, 하이포크와 더불어 이것이 국산 냉장육의 시초이다.
당시 수백 수천회의 시식행사를 하며 입이 아프게 하던 말이 “동태와 생태 차이 아시죠? 고기도 얼리지 않은 것이 맛있습니다" 였다. 이후 냉동육 시장은 급격히 냉장육 시장으로 바뀌게 되고 이 변화는 수입개방 이후 국내산 고기가 수입육과의 경쟁력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94년 3월부터는 일본수출을 개시하고 도드람 포크 품질 강화를 위해 PQA 위원회를 구성, 회원농가를 지정하고 4통(종돈, 사료, 관리, 유통 통일) 외에 농장 실명제 도입, 등급제 시행, 후기사료 급여, 180일령 이후 출하 등으로 일본에서도 선진크린포크와 함께 도드람포크는 알아주는 브랜드가 되었다.(’97년 일본 후생성 검역 면제, ’98년 냉장육에 이어 국내 최초로 지육 수출까지)
내가 살던 강남 대치동에 도드람 돈까스 1호점을 내게 되어 우리 가족은 물론 만나는 주변사람마다 데리고가 질리게 돈까스를 먹었다. 안성 LPC 선정을 위하여 정찬길 위원장(전 건국대 교수)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성시청 김제훈 축산과장과 도축장 부지를 찾아 다니기도 했다.
LPC 내 육가공 공장(바른터) 건설 중 IMF 사태로 수입 기계 값은 배가 오르고 외화 대출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금융거래는 올스톱 되었다. 부도 위기에서 살려낸 것은 당시 주주로 참여했던 대한제당과 천하제일사료였다. 공장이 완공되자 일본 바이어들이 1년치를 독점하겠다고 서로 싸울 정도로 인기가 좋아 ’99년 950만불, 다음 해에는 3천만불 수출은 무난할 것이라고 꿈에 부풀었으나, 이어서 터진 구제역으로 모든 꿈은 사라졌다. 수출 물량도 반송되고 만들어 놓았던 제품들은 일본 수출가의 1/5 가격인 1달러(당시 환율 800원대)로 러시아에 1천여톤을 땡처리하게 되어 약 30억원의 손실을 입게 되었고 이범호씨에 대한 책임과 원성, 외부자본(이지바이오)이 들어오는 빌미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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