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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

윤희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4)

‘수익보다 비전’ 품질개선 중점 공격경영 적중

[축산신문 윤희진 회장 기자]
네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상)

선진 모태 제일종축 열악환경 불구 경영활동 전폭지지
농장·사료·육가공 자체수익 재원 조달 괄목성과 이뤄


 
- 제일종축농장 입구(개축 전).
30대에 원 없이 일하다
제일제당 부산공장에서 4개월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바로 이천에 있는 제일종축농장으로 가 보니 농장 울타리도 없고 시간개념도 없이 눈뜨면 출근하고 전기가 나가면 발동기로 물을 퍼 올리는, 도저히 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이었다. 정병성 수의사(현 삼원농장 대표) 외에는 눈에 띄는 직원도 없고 돈사 시설도 형편 없었으나 미국에서 카길을 통해 도입했다는 SPF 종돈(99두) 만큼은 썩 괜찮았다. ‘선진’의 모태인 제일종축농장은 서울공대 출신 다섯분과 신학대학 출신의 윤도진 사장이 경영을 맡은 동업체로 출발하였으나 윤사장이 단독으로 소유한 사료공장의 공동 참여문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결별하기에 이른다.
’75년 10월, 이인혁 회장의 동생 이예혁씨와 필자가 동시에 부임했다. 이예혁씨는 주로 자금, 자산관리를 맡고 돼지관리와 사업 확장 쪽은 필자가 맡아 10년 가까이 좋은 콤비를 이뤘다. 농장 내에 있는 사택에서 3년쯤 살았는데, 비오는 날은 비도 새고 10km정도 되는 이천 읍내까지는 완전 자갈길에, 당시에는 차 한대도 없는 시절이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6.2km 떨어진 곳에 종돈장(선진원종농장)을 분리시켰고 장호원에 ‘코리아 화암’(현 동원리더스아카데미 자리), 그리고 마지막 작품으로 충북 진천에 SPF 종돈장을 세워 ’85년 6월말 그만 둘 때에는 총 5만두까지 사육규모가 늘어나게 됐다. 농장과 선진사료, ‘코델리’라는 육가공업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추가투자 없이 약간 배당도 해 가면서 거의 자체수익으로 재원을 조달하였으니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필자가 ‘주인’을 잘 만난 것은 이인혁 회장이란 분이 경영에는 거의 관여를 안하면서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고 배당은 최소로 하되 마음껏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주주들을 설득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선진사료 출범 당시에는 사료업이 허가제였기 때문에 남의 면허를 사올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제당3사(제일제당, 대한제당, 삼양사)가 공동으로 갖고 있던 영등포 동립산업 사료공장이 이전하자 간판만 인수하고 이천에 공장을 새로 짓게 됐다. 실무 책임자로는 필자의 대학동창인 퓨리나 출신 최환의 상무를 영입하고, 주주중의 한 분인 이원복 사장이 대표를 맡았다. 자가물량이 월 1천500톤 정도 되기는 하였으나 사료사업이 될 지, 안될 지 자신이 없었다. 일단 150톤의 규모로 공장 투자는 최소화 하고 사무실도 지을까, 말까 하다가 ‘싸구려’로 지었을 정도였다. 회사 이름은 이인혁 회장과 마주앉아 몇 개의 후보 중에서 ‘선진’으로 정하기로 했다.(당시 경기도의 ‘선진경기’ 구호가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81년 10월 당시엔 사료가격도 당국의 통제를 받던 시기여서 농장을 갖고 있던 대부분의 사료업체들이 자가 농장용, 판매용을 따로 만들고 있었으나 선진사료는 양돈 사료 전문업체에다 자가용, 판매용 구분 없이 오히려 농장 쪽과 함께 품질개선을 해 나가다 보니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생산량은 16개월 연속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고, 2년 반 만에 투자액을 회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계속 설비증설을 해야만 했다. 선진축산 그룹의 확실한 성장동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제일종축 농장은 평당 3만원짜리 돈사여서 단열도 전혀 되지 않았고 자동화 설비는 기대할수도 없었다. 한동, 한동씩 부수고 모두 새로 지으면서 모돈 규모도 1천300두로 늘렸다. 제일 큰 어려움은 당시 박민철(주주 겸) 사장이 너무 소심한 분이어서 규모를 늘리기는 커녕 돼지 값만 떨어지면 줄이자고 하는 통에 그분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편 제일종축 농장은 옆에 있는 제일농장과 함께 이 무렵부터 비육돈 위탁사육이 시작돼 ’82년도에는 7개 농가로 늘어났다. 규모는 비육용 자돈 300두 단위, 수수료는 증체 kg당 160원이니까 두당 9천600원(자돈 30~90kg 출하기준), FCR 3.2, 폐사율 1% 기준이지만 실제 연간 폐사율은 0.5%밖에 안되었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질병도 별로 없고, 돼지가 엄청 건강했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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