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사육 美서 착안…27억 투입 자돈·육성농장 건립국내 돈사 표준화 시도…아파트형 모델 만들어 전시도 J.S.R.과 제휴우선 오염이 덜 되고 다리가 튼튼한 스웨덴의 scan에 가보았고 딸 핵돈 농장이 있는 아일랜드에도 가 보았다. 모돈만 가져가고 수놈은 매주 신선정액으로만 주겠다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와는 직항편이 없었다. 영국 PIC는 CEO가 직접 나와 상세히 상담을 하는데 2위 업체 코츠월드사는 계약수의사가 간단히 설명만 하고 근처 호텔방은 아주 근사한, 대처 수상이 묵었다는 팻말이 붙은 방에 안내 해 주었다. (대접을 받은 건지 바가지를 쓴 건지 헷갈렸다.)하여간 ’95년 8월, 여러 업체 중에서 J.S.R.과 계약을 하고 포천에 신축한 세왕GGP(대표 주원상) 농장에 GGP 450두를 입식 시켰다. J.S.Rymer 회장은 원래 대단위 농업회사를 운영했고 귀족 혈통답게 훤칠하고 양돈업계에서 존경 받는 분이었으나 여러 해 전 작고하고 아들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종돈은 비교적 늦게 시작했으나 코츠월드, 뉴샴 하이브리드까지 합병하여 나중엔 영국 내 1위 회사가 되었다. ’91년 미국의 양돈 신흥지역인 노스 캐롤라이나 Smithfield 도축장과 농장을
일곱번째 이야기 내 인생의 축복 ‘다비’(Ⅰ)안성에 6백두 규모 종돈장 건립…어렵게 세계적 종돈 수입일본 수출 ‘호기’ 불구 검역서 PRRS 양성 판정 충격…좌절 맛 봐 종돈 전문으로 창업하다영국에 가있던 정영철 박사가 아이오와 대학으로 건너가 박사과정까지하는 바람에 나의 퇴직이 2년여 늦어졌고 회사 양해 하에 선진사료 앞동네에서 대월종돈장(모돈 120두 규모)이란 조그만 농장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회사일로 시간이 없어 근처에서 소 비육 일을 하고 있던 진길부 후배에게 돼지도 배울겸 내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양돈업계의 또 하나 큰 일꾼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양돈 중에서도 제일 비중이 큰 종돈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비육종’을 설립했다. 다비육종은 산자수 많으라고 많을 다(多)에 살찔 비(肥)이고 받침 없이 외국인도 부르기 좋도록 감안하였다. 주주, 임직원, 업계, 지역사회가 ‘함께 발전하는 기업’으로 키우고 싶었다. 실제 안성 지역이 약간 배타적인 정서임에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주민들과 사이좋게 지내왔다. 창립기념일은 우리 돼지가 능력검정소 초대 챔피언이 된 7월 5일로 하기로 했다. 안성 일죽의 야산 2만여평에 모돈 600두
여섯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하)원칙·인적자원 중시 경영, 계열화 사업 등 성공 원동력이인혁 회장 수차례 퇴사 만류…과분한 퇴임식까지선진은 뭐가 달랐나?선진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철저한 차단방역 - 농장입구에 사무동 건물을 지으면서 예외 없이 샤워 후 옷, 장화를 갈아입고(신고) 소독을 했다.’82년 하반기 돼지콜레라 백신이 잘못돼 전국적으로 20만두가 폐사하고(전체 사육두수 230만두 일 때) 심지어 인근 농장까지도 발생했지만 제일종축만은 안전했다.둘째, 시설자동화 - 인력을 줄이고 사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일본에서 스크래퍼 6세트, 미국에서는 ACME 무창돈사 설비를 도입했다. 쿨링패드를 설치하자 한여름 바깥 온도가 37℃일 때 실내는 29.5℃로 내려가고 체감온도는 더 시원해져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연농원 분뇨사건 여파로 일본 동해(東海)엔지니어링 시공으로 제대로 된 활성오니 시설을 구축했다. 셋째, 기획실 운영(홍보, 전산, 교육, 육가공) - 홍보팀에서는 기업 CI 작업을 하고 전산실을 차려 ‘Prime550 전산기’를 가동했다. 관계사 사원 공채 및 교육을 실시하고 본격적인 육가
다섯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중)국제수준 SPF 종돈장 목표 직원 해외연수 등 벤치마킹 집중美서 404두 수입…일반농장 위생수준 못미쳐 적응 못해 SPF 돈군 조성에 도전‘코리아 화암’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은 이인혁 회장과 가까운 사이여서 양돈사업에 흥미를 갖게 되고 새로 건설하는 농장에 30% 참여하기로 했다. 이분들이 일본 가고시마에 있는 미쯔비시 그룹에서 운영하는 6만5천두 규모(나중에 10만두)의 ‘Japan farm’을 보고 나서 그 회사처럼 키우자고 ‘코리아 화암’으로 작명을 한 바 있으나 별도 경영을 한 탓인지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다. 장호원 백족산 기슭에 22만4천평의 야산을 매입(평당 1천원에 땅값 흥정을 하다가 점심 먹고 오니 200원이 올라 결국 4천400만원짜리 점심이 되었음) 한창 정지공사를 할 무렵 나의 대학 은사이신 돈학전공 이용빈 교수님(작고)을 모시고 제일 전망 좋은 언덕에 내리니 평소 과묵하신 이 어른이 엄청난 공사 규모에 놀라 “돼지는 위대하다”고 감격해 하시던게 엊그제 같다. 삼성에서 잠깐 모셨던 네브라스카 주정부 공무원인 주현배 박사를 통해 미국의 SPF 종돈 사정을 알고 나서부터 우리나라에도 위생
네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상)선진 모태 제일종축 열악환경 불구 경영활동 전폭지지농장·사료·육가공 자체수익 재원 조달 괄목성과 이뤄 30대에 원 없이 일하다제일제당 부산공장에서 4개월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바로 이천에 있는 제일종축농장으로 가 보니 농장 울타리도 없고 시간개념도 없이 눈뜨면 출근하고 전기가 나가면 발동기로 물을 퍼 올리는, 도저히 기업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이었다. 정병성 수의사(현 삼원농장 대표) 외에는 눈에 띄는 직원도 없고 돈사 시설도 형편 없었으나 미국에서 카길을 통해 도입했다는 SPF 종돈(99두) 만큼은 썩 괜찮았다. ‘선진’의 모태인 제일종축농장은 서울공대 출신 다섯분과 신학대학 출신의 윤도진 사장이 경영을 맡은 동업체로 출발하였으나 윤사장이 단독으로 소유한 사료공장의 공동 참여문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결별하기에 이른다. ’75년 10월, 이인혁 회장의 동생 이예혁씨와 필자가 동시에 부임했다. 이예혁씨는 주로 자금, 자산관리를 맡고 돼지관리와 사업 확장 쪽은 필자가 맡아 10년 가까이 좋은 콤비를 이뤘다. 농장 내에 있는 사택에서 3년쯤 살았는데, 비오는 날은 비도 새고 10km정도 되는 이천 읍내까지는
세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하)5개돈장 6만두 사육…인근 집집마다 F1 분양 ‘양돈 메카’ 계기경영체제 바뀌며 사업 폐쇄…동료모임 ‘모교없는 졸업생’ 심정이병철 회장께선 용인자연농원에서 돼지가 생산되자 마자 F1 거세돈 1마리씩을 동네 집집마다 나눠주라고 하셨다. 사료는 부산 공장에서 수원역을 거쳐 실어왔는데(CJ 인천공장 생기기 전), 이를 계기로 용인 포곡면 일대가 국내 최대의 양돈밀집지역이 됐다. 이 회장은 당시 전국 양돈장의 호당 사육두수가 평균 두마리도 안되던 시절(120만두/70만 호)에 5만두 사육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돈사사이에 그늘이 지도록 아카시아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다음날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심어 놓아야만 했고 돈사 한쪽에 야생 멧돼지를 키우라고 하시는데, 백신을 놓을라 치면 우영제 수의사와 전봉춘 조수는 목숨 걸고 달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새끼가 자꾸 죽어서 고민도 적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집돼지와 같이 키우면 안되는 것이었다. 또, 동물원 쇼에 나갈 돼지를 훈련시키라는 말씀도 하고, 일본 NHK 양돈 프로그램을 녹화해 공부까지 시키는 등 끊임없이 숙제를 내 놓았다. 두달에 한번 꼴로 일본에 가실 때
두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중)돈사 100동 건립 강행군…이병철 회장이 직접 챙겨日서 종돈 입식 불구 사양기술 열악…폐사방지 총력 용인자연농원 준비작업 당시 우리 담당과장은 권배씨(작고, 전 사료협회 전무)였는데 이병철 회장의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이건희 부회장은 상당한 애견가로 직접 진도에 내려가 백구, 황구 30여 마리를 선발해 보내오기도 했다. 영문으로 된 두툼한 개 백과사전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72년 용인자연농원 건설이 본격화되고 사업추진이 용이한 언론사에서 ‘용인개발본부’란 이름으로 밀어붙였기에 필자도 중앙일보 3층 회장실 옆방으로 옮기게 됐다. 말석이지만 이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에 배석하기도 했는데 그 권위가 대단했다. 우선 사장단 멤버 중 전직 장관이 세분이나 되었는데,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사돈이자 전직 내무부, 법무부 장관), 삼성물산 김정열 사장(초대 국방부 장관), 박동묘 성균관대 총장(전직 문교부 장관) 등 신문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 회장 앞에서는 절절 매는 것 아닌가. 이 회장은 회의 틈틈이 당신이 왜 자연농원을 시작했는지 거듭 언급하면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첫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상)지난 1968년 대학졸업과 함께 당시 축산업진출을 서두르던 삼성그룹 입사를 계기로 사실상 양돈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 올해 초 민동수 대표에게 다비육종 경영전반을 일임하며 일선퇴진을 선언, 큰 충격을 던져주기도 한 그는 1세대 양돈인으로서 끊임없는 성장동력 제공을 통해 산업 발전을 주도해온 한국양돈산업의 거목이다. 윤희진 회장의 40여년 양돈인생, 그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굴곡진 한국 양돈사의 면면을 들춰보았다.박정희 대통령 권유…삼성 축산업 진출 의욕적대규모 종합축산단지 조성 계획 점차 흐지부지사라진 삼성목장의 꿈지난 ’68년 7월, 삼성그룹 비서실로부터 서울 농대로 졸업생 추천의뢰서가 날아왔다.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에게 축산업에 투자할 것을 권유하면서 삼성그룹 차원에서 축산업 진출을 본격 추진했기 때문이다. 삼성빌딩(구관) 505호실에서 이병철 회장의 직접 면접을 거쳐 18명 중 나를 포함하여 4명(축산학과 2, 농경제과 1, 농학과 출신 1)이 선발됐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 하듯이 실제로 관상 전문가까지 배석했었는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