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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

윤희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2)

벌거숭이 산 안타까워 나무심고 양돈 시작

[축산신문 윤희진 회장 기자]
두번째 이야기 “축산부국을 향해” 용인자연농원(중)

돈사 100동 건립 강행군…이병철 회장이 직접 챙겨
日서 종돈 입식 불구 사양기술 열악…폐사방지 총력


 
용인자연농원 준비작업 당시 우리 담당과장은 권배씨(작고, 전 사료협회 전무)였는데 이병철 회장의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이건희 부회장은 상당한 애견가로 직접 진도에 내려가 백구, 황구 30여 마리를 선발해 보내오기도 했다. 영문으로 된 두툼한 개 백과사전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72년 용인자연농원 건설이 본격화되고 사업추진이 용이한 언론사에서 ‘용인개발본부’란 이름으로 밀어붙였기에 필자도 중앙일보 3층 회장실 옆방으로 옮기게 됐다. 말석이지만 이 회장이 주재하는 사장단 회의에 배석하기도 했는데 그 권위가 대단했다. 우선 사장단 멤버 중 전직 장관이 세분이나 되었는데,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사돈이자 전직 내무부, 법무부 장관), 삼성물산 김정열 사장(초대 국방부 장관), 박동묘 성균관대 총장(전직 문교부 장관) 등 신문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 회장 앞에서는 절절 매는 것 아닌가.
이 회장은 회의 틈틈이 당신이 왜 자연농원을 시작했는지 거듭 언급하면서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두달에 한번씩 일본을 왕래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산림이 울창한 일본과는 달리 벌거숭이인 우리의 산을 매우 안타까워 했고 특히 유실수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용인 땅 450만평 가운데 밤나무 100만평, 살구동산 20만평 등을 조성, 일본에 깐밤 40톤씩을 수출하기도 했고, 거름 때문에 양돈장까지 건설하게 됐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유실수 가지치기나 거름 주는 것까지 직접 점검하는 등 이 회장은 상당한 전문가였다.
급하게 양돈 사업계획을 만들어 돈사를 지었는데 ’73년 5월 8일 마침내 일본에서 첫 비행기로 실어온 종돈 136마리가 돈사바닥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입식돼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중앙일보에 구인광고를 내고 시험을 거쳐 선발한 창설 요원 12명도 같은 날 용인 현장에 도착하였으니 그 모든 것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때 들어온 대졸 신입 4명 중 세명은 이후 박사(정영철, 윤덕영, 백영진)가 되고, 고대출신 배동만씨는 삼성계열(에스원, 제일기획) 사장까지 지냈으니 사람은 잘 뽑은 셈이었다.
종돈은 일본 Saiboku에서 5월22일과 6월 5일, 그리고 10월에 한 비행기 더 해서 모두 614마리를 도입했다. 종돈 한 비행기가 들어올 때마다 일본인 기술자가 한명 따라와 3주일 동안 A/S를 해 주었는데 당시 국내에는 양돈 관련 책자가 거의 없어 사사자끼 Saiboku 사장이 쓴 ‘양돈대성’이 유일한 우리들의 교과서였다.
돼지코에서 피가 나와도 AR이 뭔지도 모를 정도였는데(도입 후 석달 동안은 폐사가 없었지만) 원종돈이라고 도태는 절대 못하게 했고 한마리라도 죽게 되면 우영제 수의사와 나는 본사 본부장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곤 했다.
자연농원 양돈장이 들어선 용인 포곡면 일대는 원래 좀 추운 지역인데 그 당시 추위는 정말 대단했다. 그렇다고 2년 동안 돈사 100동을 짓는데 춥다고 멈추는건 ‘삼성스타일’이 아니었다. 직사각형 건물 기초부위에 왕겨를 뿌리고 불을 붙여 언 땅을 녹인 다음 흙을 파내고 공사를 강행했다. 아침 6시에 기상, 구보를 시작하여 저녁엔 교육 등 군대가 따로 없었지만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이때는 이 회장께서 산너머 한옥에 상주하며 서울로 출퇴근 하던 시절이라 상시 초비상 태세였다. 아침에 서울에서 송세창 비서실장이 모시러 오고 다시 저녁에는 용인까지 수행하여 모시고 오는 그런 식이었다. 양돈 현장에도 거의 매주 한두번, 언젠가는 한주에 세번을 둘러보신 일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분이 용인 자연농원 사업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셨는지 알고도 남을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결혼한지 1년 반쯤 지났고, 가족은 안양에 있는 삼성 사우촌에 살았는데 도저히 농장을 비워놓고 집에 갈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큰애 돌 날도 밤 늦게야 집에 도착하니 손님들은 다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이혼감인데 용케 참아준 아내가 평생 고맙기 그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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