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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

윤희진 회장의 나의꿈,나의열정 브라보 양돈인생(6)

원없이 쏟아부은 ‘땀의 결실’ 보람…창업 제2도전 결심

[축산신문 윤희진 회장 기자]
 
- 제일종축농장 임직원들이 체육대회 후 자리를 함께했다.(앞줄 제일종축 푯말 뒤에 이예혁 사장, 그 오른쪽으로 이인혁 회장과 필자)

여섯번째 이야기 원칙을 고집한 선진, 그리고 성공(하)

원칙·인적자원 중시 경영, 계열화 사업 등 성공 원동력
이인혁 회장 수차례 퇴사 만류…과분한 퇴임식까지


선진은 뭐가 달랐나?
선진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철저한 차단방역 - 농장입구에 사무동 건물을 지으면서 예외 없이 샤워 후 옷, 장화를 갈아입고(신고) 소독을 했다.
’82년 하반기 돼지콜레라 백신이 잘못돼 전국적으로 20만두가 폐사하고(전체 사육두수 230만두 일 때) 심지어 인근 농장까지도 발생했지만 제일종축만은 안전했다.
둘째, 시설자동화 - 인력을 줄이고 사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일본에서 스크래퍼 6세트, 미국에서는 ACME 무창돈사 설비를 도입했다. 쿨링패드를 설치하자 한여름 바깥 온도가 37℃일 때 실내는 29.5℃로 내려가고 체감온도는 더 시원해져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연농원 분뇨사건 여파로 일본 동해(東海)엔지니어링 시공으로 제대로 된 활성오니 시설을 구축했다.
셋째, 기획실 운영(홍보, 전산, 교육, 육가공) - 홍보팀에서는 기업 CI 작업을 하고 전산실을 차려 ‘Prime550 전산기’를 가동했다. 관계사 사원 공채 및 교육을 실시하고 본격적인 육가공 사업 준비를 했다.
넷째, 체계적인 품질관리 - 서울대 축산과 박영일 교수와 수의대 박응복 교수를 육종과 위생 기술고문으로 모시는 한편 ’82년부터 사내 분임조를 조직하고 품질관리 전문가를 초빙하여 매년 경진대회를 실시하므로써 나날이 생산성도 향상되는 효과를 거뒀다.
다섯째, 사원 복지 - 당시의 농장으로는 과분할 정도의 기숙사 시설, 통근버스 운행, 잔디구장, 야간 테니스장, 장학금 지급 등을 대표적 사원복지 사례로 꼽을 수 있다.
’73년에 생긴 용인자연농원, 제일종축농장, 연암전문대 양돈장 이전에는 기업양돈장으로는 평택 남부농산 정도가 있었다. 그 후 여러 농장이 생겼는데 특히(이인혁 회장의 인성수산을 포함) 원양어업을 하는 업체들(구일산업, 대왕수산, 동원수산, 삼원기업, 사조산업 등)이 양돈업에 많이 진출 했으나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유독 선진만이 대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견해로는 우선 양돈산업이 태동기를 거쳐 성장기에 진입하며 호황을 만끽했다.
무엇보다 철저히 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하려 애썼고, 농장-사료-육가공의 순서로 계열화 준비 단계를 밟아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 경영인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다. 초창기에만 꼽더라도 남대현(부회장까지 역임), 최환의, 장경국(이상 사료), 정영철, 우영제, 이정원, 김동식, 장국원(이상 농장), 김경우(제일제당 육가공, 롯데 근무, 작고) 등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83년 이후 공채를 통해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집하고 교육시켰다. ’85년 6월말 내가 퇴직할 당시 지금처럼 기업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축산, 수의 전문직이 52명이나 됐다. 이러한 인적자원이 이후 본격적인 계열화 사업, 법인상장, 해외진출 등에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30세에 선진으로 옮겨와 10년 가까이 밤낮없이 많은 일을 했으나 늘 내 농장에 대한 꿈은 버릴 수가 없어 “창업은 늦어도 40세를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 했었다.
이 회장께 말씀드려 자연농원 양돈부에 근무하던 정영철씨를 나의 후임자로 천거하고 곧바로 (’82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 Animal Production 대학원 코스에 유학을 보내는 한편 우영제씨(현 SRC 사장)를 농장장에, 기획실장에는 장국원씨(현 가보영농 대표)등 용인출신들을 영입해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두루 조치했다.
나때문에 용인 출신들이 줄줄이 이천 땅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사료 책임자인 최환의 상무가 회사를 먼저 그만두게 되자 이원복 사장은 사료사업까지 나보고 맡으라고 여러 번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창업을 해야할 시기라는 결심을 굳힌 터라 사료 전문가인 대한제당에 있던 남대현 선배를 영입하기로 했다. 이인혁 회장께서는 그 후에도 여러 가지로 회사에 남아달라며 설득 하시다가 결국은 분에 넘치는 퇴임식과 상당한 액수의 전별금을 주셨다. 퇴직 후에도 지금까지 ‘선진’은 늘 친정처럼, 그리고 이 회장님은 존경하는 어른으로 모셔왔지만 어느 사이 기업의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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