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초근목피(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도 했다. ‘70년대 들어서 소위 ‘녹색혁명’으로 통일벼 등 다수확품종을 개발하여 보릿고개란 용어도 사라지고 배고픔도 잊게 됐다. 그 뒤 ‘80년대 비닐하우스를 개발하여 가뭄도 이기고 다수확에 성공하는 ‘백색혁명’을 일으켜 국민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였다. 또 고급화 농산물 생산을 위한 수경재배방법을 개발보급도하여 명실상부한 선진농업국으로 진입하게 됐다. 이런 모든 것은 농촌진흥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실학의 비조(鼻祖)라고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 선생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지금의 수원(水原)을 지목해 극찬했다. 팔달산 주위 넓은 들녘과 광교산으로 부터 흘러내리는 버드내(하천)까지 갖춘 지역이면서 교통의 요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수원지역의 토양은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이 들어와 살 리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정조 대왕께서는 척박한 농토를 최고로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원으로 모여드는 백성들에게 대대적인 퇴비 증산을 지시했다. 너무도 척박해 거들떠보지 않던 땅이 3년 동안 퇴비를 투입하자 마침내 최고의 토양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수원은 정조 대왕께서 출발부터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만든 계획도시다.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리 시설이 가장 중요하다. 정조대왕과 실학자들은 이를 특히 주목해서 물 걱정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수원일원에 1795년에 만석거(萬石渠), 1798년에 만년제(萬年堤) 1799년 축만제(祝萬堤)(지금의 서호) 등의 저수지를 축조하고 주변에 만년둔(萬年屯)과 대유둔(大有屯이)라는 국영농장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정조 대왕께서는 농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최초의 저수지를 건설한 것이다. 정조대왕의 저수지 건설은 혁신 그 자체였으며 수원을 한국 농업 연구의 핵심이 되게 하는 근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수원은 한국 농업의 메카라해도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1906년 통감부 훈령에 의거 농촌진흥청(당시는 권업모범장), 이듬해 농대가 수원에 설립·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올해는 농진청 102주년이고 금년은 농대 101주년이 된다. 우리나라 성군 중에 가장 뛰어난 분 중 한 분이 정조 대왕이라고 한다. 정조 대왕께서는 수원화성(華城) 축조 3년 뒤 1799년 지금의 농촌진흥청 일대에 국영시범농장을 마련하고 ‘축만제(祝萬堤)’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지금의 서호(西湖)저수지다. 국영시범농장인 둔전의 관개용수로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 인공저수지는 관개용수뿐아니라 시쳇말로 관광저수지로도 이용토록 하였다. 바로 그곳에 오늘의 농촌진흥청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진흥청 일대의 동명이 서둔동(西屯洞)이 된 것은 서호와 그 일대의 둔전이 있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특히 서울대 농대생들의 모임에 ‘서둔회(西屯會)’란 명칭의 모임이 많은 것은 서둔동의 정취 때문이다. 정조 대왕께서는 200년 전에 수원 천도(遷都)와 관련하여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수원을 한국농업의 중심지로 만든 것이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 통감부 통감이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마저도 정조대왕의 그 깊은 뜻을 헤아려 그 자리에 권업모범장과 농대를 설립한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농업기술원, 농사원을 거쳐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확대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조 대왕께서 농업을 중시하신 숭고한 뜻을 오래도록 계승 발전시켜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