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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론 안된다” 위기감 앞에 ‘팩커 육성’ 논의만 무성

■기고/ 남미 육류산업 현장 방문기<마지막회>

  • 등록 2010.09.30 15:05:08
 
- 가축분뇨를 활용하고 있는 칠레의 전형적인 키위농장.
④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마지막회】

우리의 남미 출장은 브라질과 칠레의 육류산업 실태를 돌아보고 세계시장을 상대하는 미트 팩커(meat packer)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격이 컸다. 다른 나라 방문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출발의 분위기는 다소 가벼웠지만 돌아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기분이 착잡했고 뭔가 모를 불안감과 자괴감이 귀국하는 일행의 주위를 맴돌았다.

실행하는 그들, 탁상에 그치는 우리…시장 잠식 우려
팩커는 소비자 요구에 따라 시장이 만들고 키우는 것

남미는 비행기로 꼬박 하루를 날아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들은 우리와 같은 장시권(場市圈)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식품이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양이 늘어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육류산업이 우리의 경쟁력을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후진국이라 생각했던 칠레와 브라질은 적어도 축산육류 분야에서는 우리를 훨씬 앞서가고 있었다. 축산에 적합한 자연환경이나 드넓은 경작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산성에서 앞서 있었고, 전문화 규모화에서 앞서 있었다. 업계의 치열한 경쟁, 글로벌 마인드, 세계적 수준의 품질 위생관리 능력 등이 우리를 앞질러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너무 모르고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를, 특히 우리의 시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야 백전불태(白戰不殆)라는데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전쟁터나 나름없는 시장경쟁에서 승패와 우열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팔고 우리는 산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더 많이 팔고 우리는 더 많이 사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시종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일행들은 일정 중간중간에 틈나는대로 토론회를 벌였다. 묘한 경쟁 관계가 있는 농협과 민간기업의 CEO와 임원들, 축산분야 연구자, 정책담당자들이 그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우리나라 축산업과 육류산업의 현실과 미래를 논의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진단은 일치했고 처방은 다소 달랐지만 ‘무언가 해야 한다’는 비장한 결론은 함께 했다. 하지만 국내의 현실은 너무 안일하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가진 위기감은 공유되지 않고 있다.
“돼지 분뇨가 키위죠.” 칠레 아그로수퍼 관계자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뇌리에서 맴돈다. 그들은 실제 돼지 분뇨를 처리장에서 발효시킨 후 처리장을 둘러싸고 있는 인접 키위 과수원에 퇴비 비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돼지분뇨가 곧 키위’라는 말은 농담이 아닌 사실이다. 분뇨를 자체처리하지 않고 파이프를 통해 한참 떨어진 곳으로 이송시키니 9천두의 모돈이 우글거리는 농장에서 역한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경종농업과 축산을 순환시켜 자원을 재사용하면 비용도 줄이고 환경에 대한 부담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역시 상식이다. 다만 그들은 시스템을 갖추고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탁상의 논의만 무성할 뿐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이는 무엇일까? 첫째 그들은 극단적인 인테그레이션(직영 수직계열화)을 통해 농장을 최적화하여 배치했지만 우리는 개별화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분뇨를 자원화할 수 있는 기술과 시스템은 개발되어 있고 그 필요성과 당위성에도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500두나 1천두 규모의 개별 소유의 농장에서 독립적으로 기르고 있으니 농장마다 자원화 설비를 갖춰야 한다. 농장끼리 잘 합의한다 하더라도 집중화 처리 역시 불가능하다. 농장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송비용을 따지면 배보다 배꼽이 클 수 있다.
두 번째, 우리나라에서도 안전한 액비를 생산한다. 하지만 액비를 사용하는 순간 비용이 수반된다. 운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축산농장과 분뇨 처리장과 경작지가 따로 떨어져 있고, 소유자가 다르고, 그들끼리 연계와 통합이 부족하다.
이같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칠레와 우리나라 축산업의 경쟁력 격차를 만든다. 모든 축산농장을 직영 통합경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연계와 통합은 가능하다. 누군가는 연계와 통합의 중심에 서야 하고 리더십과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축산분뇨를 포도로, 복숭아로, 쌀로, 목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축산업계에서는 대형 팩커(Meat Packer)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통합경영(계열화)에 대한 논란과도 연결되어 있다. 팩커가 이슈로 등장하게 된 까닭은 정부가 대형팩커 육성 정책을 내놓았기 때문인데 축산육류산업의 경쟁력을 키워보자는 뜻이라면 좀 더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예컨대 ‘축산 농가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2~3개 민간 대형 팩커만 육성하면 20만 축산 농가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든지, 폐업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등의 주장은 이슈의 본질과 벗어나 있다.
팩커는 새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다. 육류식품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서 발전해온, 도축-가공-소분포장-육가공이 통합적으로 이뤄지는, 육류식품 공급사슬 가운데의 하나인 가공부문(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큰 규모로 하면 대형팩커이고, 그 소유자가 민간이면 민간기업형 팩커, 협동조합이면 협동조합형 팩커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거에는 단순히 도축만하여 중간유통업자에게 넘겨버리는 전통적인 도축장이 팩커였고 오늘날에는 도축과 가공 및 육가공 처리한 뒤 종합물류센터까지를 운용하는 팩커들이 대부분이다. 오늘날의 팩커는 위생적으로 잘 손질된 고품질의 고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육류시장에서의 경쟁은 팩커들간에 이뤄지며 그들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패배하여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규모화를 통해 더 큰 경쟁력을 갖기 위해 합병하기도 한다.
돈육산업의 세계적인 강자 덴마크에서는 35년전 70여개의 팩커들이 경쟁했다. 각각의 팩커들은 양돈농가들이 협동조직에서 만들었다. 그 팩커들은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상호의 이해에 의해 인수합병을 하며 규모를 키워갔다. 오늘날 덴마크에는 대니쉬크라운(Danish Crown)과 티칸(Tican) 2개의 대형팩커가 남았다. 그렇다고 덴마크의 양돈업이 팩커가 줄어든 숫자만큼 왜소해졌을까? 인구 500만명의 덴마크는 여전히 연간 2천500만두 안팎의 돼지를 도축가공하여 세계 곳곳에 팔고 있다. 95%를 점유하는 대니쉬크라운과 5%의 티칸은 차별화를 통해 경쟁하고 있다. 둘 다 협동조합형 기업이다. 물론 소유와 경영이 잘 분리되어 있다.
하루에만 소를 9만두 도축하는 글로벌 기업인 브라질의 JBS나 직영 통합경영 시스템을 갖춘 칠레의 아그로수퍼는 민간기업이다. 이들 대형팩커들이 브라질, 칠레의 축산업을 이끈다.
데니쉬크라운과 JBS, 칠레의 아그로수퍼, 미국의 스미스필드 등과 같은 글로벌 팩커들은 세계 곳곳에서 경쟁한다. 소유구조나 원자재 조달 방법과 상관없이 이들은 오로지 가격과 품질로 경쟁한다.
글로벌시장이건 내수시장이건 육류시장은 한마디로 팩커들의 전쟁터다. 팩커없이 생산농가들이 시장을 직접 상대할 수 없다. 팩커가 시장을 개척해야 생산부문이 활성화하고 팩커가 강한 경쟁력을 가져야 생산농가의 소득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팩커를 백안시하거나 심지어 팩커가 시장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가공공장을 현대화하는데 대한 투자마저 경계한다.
팩커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경쟁력을 위해 여러 가지 효율적인 시스템을 실험한다. 그중의 하나가 계열화(인테그레이션)다. 1930년대 미국의 육계산업에서 시작된 인테그레이션은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그 효용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 육계산업의 발전사만 보더라도 계열화의 성과는 자명하다.
팩커가 계열화를 주도하는 인테그레이터(계열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생산과 판매부문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단순한 개입자가 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내가 선택한 고기가 어떤 품종이며, 어디 어떻게 생산된 사료곡물로 어떤 방식으로 제조된 사료를 먹고 자랐는지, 사육과정이 적정하며 학대받지 않았는지, 도축 가공과정이 위생적이며 품질관리는 제대로 이뤄지는지, 유통과정은 안전한지, 조리는 편리한지 등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이렇게 까다로운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면 생산과 가공, 유통의 이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그 방법은 강력한 인테그레이션이어야 가능하다. 팩커는 소비자의 신뢰확보를 위해 인테그레이션을 택한다.
따라서 인테그레어터(계열주체)로서의 팩커는 소비자와 시장이 만들고 육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대형팩커를 육성한다는 전제는 틀린 얘기가 된다. 정부는 결코 팩커를 만들고, 키우고, 합치는 일을 할 수 없다. 시장의 필요에 의해 팩커가 탄생하고, 시장에 요구에 따라 경쟁하며, 경쟁을 통해 성장하고, 더 큰 경쟁력을 갖기 위해 합병하기도 한다. 정부가 육성한다는 주장은 넌센스다.
또 하나, 팩커는 기본적으로 생산부문을 착취하여 성장할 수 없다. 팩커끼리 경쟁하여 패자가 생길 수 있지만 팩커가 강력해지면 생산부문은 오히려 발전한다. 팩커의 경쟁력이 시장을 확대하고 시장이 확대되면 생산부문은 당연히 활성화한다. 유럽과 남미의 축산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사료곡물을 100% 수입하는 등 축산부문의 원가 경쟁력이 근본적으로 취약한 나라에서 가공부문, 즉 팩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이들이 품질 경쟁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브라질, 칠레 등 생산부문의 원가경쟁력이 탁월한 나라의 육류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원가 격차를 최소화한 뒤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품질 격차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팩커가 일정한 규모를 갖춰야 하고 시설을 현대화해야 한다. 자본의 투입이 필요한 것이다.
팩커가 규모화하건 규모화하지 않건, 계열화를 하건, 하지 않건, 그 소유가 민간기업이건, 협동조합이건, 농업법인이건 상관없이 시장 경쟁력을 가져야 축산업이 살 수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육류를 만들어 공급해야 산업 전체가 지속될 수 있다. 생산자의 필요나 기호에 따라 제품을 생산해 놓고 시장에서 팔리지 않음을 불평해서는 안된다. 생산자가 엇박자를 놓을 때 외국산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는 정부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국내산 육류시장을 외국산이 잠식하면 생산부문이 축소되고 가공공장이 사라지게 된다. 일자리가 없어진다. 상상하기 조차 싫은 미래가 현실이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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