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돈환 수의사 1996년 경북대학교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대학원 수의병리학 석사 과정을 2004년 수료했다. 대관령 삼양목장 관리 수의사와 양지화학 경북지역 약품 영업담당자로 일하다가 2000년부터 동물약품 다국적 기업인 인터베트 코리아에서 지역 영업 담당과 양돈팀 기술 지원 마케팅 매니저로 근무했다. 올 초부터는 동물약품 다국적기업인 쉐링푸라우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부모님의 새벽 첫 일은 소죽을 쑤시는 것이었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굶길 수 없는 것이 농사꾼의 마음이다 보니 우리 집 소들은 사람보다 먼저 아침을 먹었다. 뭉근하게 끓인 소죽을 구유에 부으면 소들은 반갑게 울었고 그 소리에 나는 단잠에서 깨곤 했다. 지금도 가끔 새벽을 깨우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 가족과 함께했던 소의 눈망울이 나를 수의사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일이, 넥타이에 양복보다는 청바지에 셔츠가 더 좋았던 나는 국내 최대의 젖소 농장인 대관령 삼양목장 관리 수의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 동물(산업동물) 병원 개업을 희망하는 초보 수의사는 농장에서 관리 수의사로 일하면서 경험을 쌓는다. 일종의 인턴수업이라고 할까. 관리 수의사라고 해서 세월 좋게 동물 진료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소 건강관리 및 질병 치료, 분만처치는 기본이고 일손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만능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 겨울철,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추위와 국내 최대의 적설량을 자랑하는 대관령 최정상에 위치한 목장. 구경차 들른 사람들에겐 천혜의 관광 명소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며 새벽부터 젖소들과 씨름해야 하는 내겐 자연과의 일대 결전장이었다. 젖소 목장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착유실과 분만실이다. 대부분의 질병이 이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관리 수의사의 주요 업무는 이곳에서 생기는 질병을 관리하고 예방하는 것이다. 목장에서 일하는 동안 몸무게가 45kg에 육박하는 신생 송아지 거의 대부분을 내 손과 가슴으로 받아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소나기인가 하며 심상하게 진료 준비를 하고 있는데 방목장에서 긴급히 연락이 왔다. 처음으로 임신한 초임우가 갑자기 출산 징후를 보이는데 아무래도 난산이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산 정상의 방목장까지는 차로 20분 거리이고 길도 험하다. 이렇게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면 길이 미끄러워 차가 올라갈 수 없는데… 초산에 난산이라면 어미와 새끼 모두 위험한 상황이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장비를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앞이 안보이고 길은 미끄럽고. 이리저리 구르기를 몇 차례, 겨우 방목장에 도착했다. 방목장 할아버지는 숙소 처마 밑에 소를 옮겨 놓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방목장에는 따로 축사가 없기 때문이다. 소 자궁에 손을 넣어 새끼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위치는 정상이었지만 크기가 너무 커 자궁 경관에 머리가 끼어 있었다. 어미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어미에게 링거를 꽂고 분만 보조 작업에 들어갔다. 자궁에 손을 넣어 새끼의 다리를 밧줄로 묶고 방목장 할아버니와 함께 밧줄을 당겼다. 아, 무사히 새끼를 꺼냈다. 땀과 비, 소의 자궁 내용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으면서 비실비실 웃었다. 이게 수의사 일을 하는 맛이다. 2년여 목장 생활을 정리하고 대동물병원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대동물병원 개업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개업을 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도 많았다. 개업비용도 없었고, 곧 꾸리게 될 내 가정의 생계도 안정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무엇보다 2년 남짓한 현장 경험만으로 올바른 진료를 할 수 없을 것인지가 걱정이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차에 한 선배가 동물 약품 회사에 자리가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응시해 보라고 권유 했다. 당시만 해도 수의사가 동물약품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좀 생소했다. 더구나 임상 진료가 아닌 약품영업을 병행하는 지역소장에다 그나마 임상 경험이 있는 ‘소’가 아니라 돼지용 약품이라니. 돼지는 잘 모르는데, 약품에 대한 전문성도 갖춰야 하는데 하며 망설였다. “돈환이라…이름에 돼지 돈 자가 들어가니 일도 잘하겠구만!” 그즈음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마음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약품회사에 들어갔다. 회사 내에서 나의 공식적인 직함은 TRS(Technical & Sales Representative) 대구 경북 지역 담당자였다. 지역 담당자의 주 업무는 자사 제품을 동물 약품 판매점(대리점)에 소개해 판매를 향상시키고 농장에서 질병 처치 및 약품 사용에 있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를 해결해 주고 제품에 대한 적용 방도를 제안해 최종적으로 농장에서 자사 제품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대리점이라는 1차 유통망과 실질적인 최종 소비자인 농장주라는 이중 구조를 원활하게 연결하고 수의사라는 지위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최종 소비자인 농장의 요구를 반영한 제품을 공급하려고 애쓰는 한편 농장에서 흔히 부딪치는 주요 질병 관리 및 농장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서 농장주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필수여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낯선 시골길을 헤매며 농장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제품도 판매했다. 하루 평균 자동차 운행 거리만 5백km, 월 평균 1만 km에 육박했다. 정말 달리고 또 달렸다. 일반적으로 도시 택시 기사의 하루운행 거리가 3백에서 4백km라고 한다. 지역 담당자에게는 휴일이 따로 없다. 다음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