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네 약 때문이야. 당신이 책임지시오” ■김돈환수의사 경기북부 지역 당당자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백신을 주사한 부위에 농이 생겨 돼지가 죽어 간다고… 대략 상황을 파악하고 농장으로 차를 몰았다. 농장에 도착해 지역 담당자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고 대처 방안을 의논했다. 백신 접종을 누가 하는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다른 백신이나 항생제 주사 시에는 어떠한지 등을 우선적으로 파악해 나갔다. 농장주를 만나자 다짜고짜 당신네 백신이 상해서 돼지들이 죽어 가니 당신이 책임지라고 막무가내로 소리쳤다. 우선 농장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사 후 농이 생길 수 있는 여러 경우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경우의 수를 줄여 가며 설득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 완고하던 농장주도 차분한 설득에 조금씩 마음을 풀었다. 우선 돼지의 농 부위를 절개해 농을 제거하고 감염 방지를 위한 소독과 함께 항생제 및 영양제를 주사했다. 4시간 정도 걸려 치료를 하고 나니 온통 땀과 농, 소독약으로 범벅이 되었다. 농장주는 이제야 마음이 완전히 풀렸는지 수고했다며 앞으로의 처치 방안에 대해 의논하자고 한다. 이런 경우는 흔하다. 문제는 해결하는 방식인데 나는 서로 신뢰를 유지하면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누구의 잘못인지 추궁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나면 뿌듯한 마음에 잠시 피곤을 잊기도 한다. 잦은 출장과 긴장되는 해외출장 농장 방문과 교육, 세미나 등으로 일주일에 3-4일은 출장인 경우가 많다. 아내는 영업할 때보다도 더 안 들어온다며 성화다. 회사 일은 혼자 다 하느냐, 아이가 아빠 얼굴도 잊어 먹겠다며 불만을 터뜨리곤 한다. 이럴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현장을 생각하며 오늘도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농장주 대상 세미나에서 가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현장과 밀착하고자 노력한다. 농장의 돼지들과 씨름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곤 한다. 이런 이유에서 회사에서 브리핑 자료를 만들고 영업 전략을 분석하는 일보다 농장의 돼지들과 씨름하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잦은 출장을 다니다 보면 마음과 달리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장거리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서초 IC를 지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깜빡 졸아 앞차와 부딪히기도 했다. 상대 운전자의 일그러진 얼굴, 어렵게 사고를 수습하고 다시 운전대 앞에 앉으면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잠시 허탈해지기도 한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걸까… 회사가 다국적 기업이고 업무가 업무다 보니 본사 교육 학회나 박람회 참관, 아시아 지역 담당자 미팅 등으로 외국 출장이 1년에 서너 번은 있다. 특히 장기 출장일 경우 언어 스트레스도 있고 현지 음식과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아 외국 출장은 항상 긴장된다. 긴장감 때문에 사소한 실수를 하기도 한다. 본사에서 지원하는 양돈 질병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무사히 2주간의 일정을 소화하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네덜란드 전역을 관통하는 철도를 탔다. 확인한다고 했는데 타고 보니 반대 방향 기차였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동시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날 듯이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에서 내렸다.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해 어렵게 공항발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 온 10년 돌이켜 보면 앞만 보고 달려온 10년여 세월이었다. 지금껏 나름대로 재미있고 보람있게 일해 왔으며 조그만 꿈도 키워가고 있다. 그 꿈은 바로 언젠가 민간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출장 때 민간 진단 기관을 보고 매우 부러워했다. 특히 농장주의 자발적인 요구와 필요에 의한 민간 투자로 설립된 연구소의 역할과 운영 방식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역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소를 만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수의사인 내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이름은 돈환이다. 도타울 돈(敦)에 불꽃 환(煥)을 쓴다. 하지만 수의사로 일하면서 내 이름을 돼지 돈(豚)에 기쁠 환(歡)으로 풀이하기를 즐긴다. “돼지와 함께 기뻐하다”쯤으로 혼자 해석한다. 나는 돼지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쁘다. 이름으로 시작된 소중한 인연을 지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