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째 이야기 땀의 열매 맺은 국제축산박람회(하)저널리스트 프로그램 가동…한국축산 알리기 큰 반향“잘 키워보자” 자신감도 생겼지만 뜻 달라 재추대 고사입지는 적합, 시설은 낙제해외 홍보를 위해서는 ‘저널리스트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9개국 10명의 전문언론인들을 미리 초청하였다. 2박 3일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장, 동물약품, 사료공장, 연구소 견학에서부터 생산이력제에 이르기까지 계획대로 보여주고 마지막날 저녁 최염순 농림부 담당관 참석 하에 63빌딩 꼭대기에서 멋있는 만찬도 베풀었다. 한국 축산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던 이들로부터 반향은 매우 컸다. 돌아가서 자기네 신문잡지에 표지사진에서부터 대대적인 한국 특집기사를 여러달 실어주었다. CJ, 카길 등은 해외법인 직원 및 거래선들을 다수 초청하였고 사우디, 아프리카 등에서까지 와 주었다. 개막일에 제일 골치 아픈 문제는 테이프 커팅자리에 누구를 초청하느냐, 누가 가운데 쪽에 가까이 서느냐? 때문이다. 압력도 많고 욕도 먹고… 아예 나는 자진해서 맨 끝에 서 버렸다. 한국에서만 있는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대한양돈협회를 비롯, 각 협회 직원들과 사무국 그리고 38명의 자원봉사자 모두가 최선을 다한 결과
“최고의 행사 만들자” 해외 유수전시회 노하우 습득 동분서주 다양한 부대행사 큰호응…임시부스 증설·관람객 줄이어생산자 박람회로 자리매김2004년 12월 5개 축산단체가 2년마다 돌아가면서 주관하는 박람회가 양돈협회 차례가 되어 내가 추진위원장으로 지목되었다. 그 동안 오봉국 은사님, 김남용 회장님이 이끌어오신 영예로운 직책으로 알고 기꺼이 수락하면서 한편으로는 이걸 마지막으로 밖의 일은 더 이상 맡지 않고 그 동안 소홀히 했던 회사 일에만 전념하리라고 다짐했다. 아예 가족과 직원들에게도 공언하기까지 했다. 농가 접근성 용이 ‘대전으로’문제는 9개월이 채 남지 않은 준비기간 이었다. 우선 박람회의 성격을 소비자가 아닌 축산농가 위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모든 면에서 불편한 서울 복판 COEX에서 할게 아니라 대전에서 개최하기로 바꿔버렸다. 출전 업체들은 경비가 많아져 불편하지만 전국의 축산인들의 접근성은 월등히 낫기 때문이다. 박람회야 국내외로 나도 수없이 다녀 봤지만 막상 주최자 입장에서 봐야 할 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아 즉시 하노이에서 열리는 Vietstock으로, 3월 15일에는 VIV-ASIA(방콕)에 팀을 만들어 조사 겸 판촉을 나갔다.
21번째 이야기 방역본부 전신 ‘HC 비대본’(하)5대질병 근절 목표 (사)가축위생방역본부로 확대 개편축산업계 방역의식 고취 계기…‘산업훈장’ 영광도 안아 방역본부로 전환전국에서 방역요원 50명을 차출하여 긴급 투입하였고, 주사기, 분무기, 약품, 방역복 등을 관급 나오기 전에 즉시 지원하였다. 여 수의사까지 포함, 요원들은 밤낮없이 정말 열심히 하여 방역 요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주었고, 상황이 끝난 후에는 포천에서 전원 2박, 목욕 후 귀가시켜 만일의 위험에 대비하였다. 검역원 직원들이 밤 늦게까지 고생이 많았는데 간식도 조달하고 분위기가 너무 썰렁해 화분을 하나 사다 놓기도 하였다. 시군과 경기도의 역할분담도 어정쩡하고 보상기준도 그렇고 처음이다 보니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화성을 거쳐 충남 홍성에서 또 발병신고가 들어왔다. 파주 신고자도 방역단의 성차현 수의사요, 홍성의 최초 신고자도 동물병원을 운영하던 박세종 방역요원으로 역시 방역단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4월 4일 사료회사까지 포함 최대 55명의 긴급방역단을 또 투입하고 홍성군청에 상근하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식목일에는 전국적으로 산불이 많이 났었는데, 우리 일죽농장 인
황병익 회장 (한국낙농경영인회 /농도원목장 대표)온갖 방역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장 주변으로도 벌써 2개의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습니다. 매일 아침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던 가까운 목장들도 구제역 양성판정 내지는 감염반경에 포함돼 하나 둘씩 살처분 되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지난 몇 주간은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얼굴도 모르는 어느 낙농후계자로부터 눈물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미 자기 목장을 비롯해서 그 지역 대부분의 젖소들이 구제역으로 살처분 되었고, 그 지역이 유난히 젊은 후계자가 많았던 터라, 나이어린 낙농가들은 매일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이미 살처분으로 실의에 빠진 젊은 후배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평소 가까웠던 경기도 양주의 한 2세 낙농가의 목장에서도 얼마 전에 구제역 양성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의 부친은 저와 오랜 동료로 40년 동안이나 평생 일군 목장을 자식에게 물려준 뒤였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면서 총 소비량은 2020년에 대략 5천2백만톤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0년과 2020년 사이에 중국인의 1인당 평균 돼지고기 소비량이 증가 할 것 같지는 않다고 중국동물농업학회의 사무 부총장인 마 케웅 박사(Dr. Ma Caeung)가 독일의 하노버에서 열린 2차 중-유럽 양돈회의에서 밝혔다. 하지만 이 기간에(2010에서 2020년) 해마다 6천만~7천만씩 증가할 중국의 인구를 감안했을 때 년간 총 소비되는 돼지고기의 양은 2020년에 5천2백만 톤에 이를 것이다. ◆소규모 농장들돼지의 생산성이 중국 양돈농가에서 문제라고 마 박사가 말했다. 중국에는 6천만 5백 개의 농장이 있는데 그 중 6천2백만 농장은 아주 소규모이다. 한 마리 돼지를 기르는 각각의 소규모 생산자의 평균 6천2백만 마리의 돼지가 국가 두수 전체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러한 소규모 생산자는 변하고 있다. ◆생산에 대한 제약들중국의 가축 생산은 환경 보호를 위한 많은 제약들에 마주하고 있다고 마 박사는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중국 돼지는 동부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땅과 곡류에 대한 더 좋은 접근성을
20번째 이야기 방역본부 전신 ‘HC 비대본’(중)질병온상 용인지역, 옛 인맥들 도움으로 간신히 채혈2000년 구제역 발생…현장가는 착잡한 심정 못잊어 H.C.박멸에 매진일선 시군 지역의 양돈농가 방역 지원을 강화하기 위하여 9월 1일까지 양돈농가 40호 이상 110개 시·군에 1~2명씩, 특별히 홍성군에는 3명의 요원을 배치하고 제주를 제외한 8개 도본부로 조직을 완료하였다. 충남대 수의대에 돼지콜레라(이하 H.C.) 방역단과 요원 152명을 모아놓고 교육을 하는 것으로 힘찬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방역요원들은 대우도 시원찮고 신분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모두 열심히 해 주었다. 본부에서는 각종 책자와 언론홍보, 2주 간격으로 활동 보고서를 배포하여 분위기를 잡아가고, 농림부에서는 항체가 검사결과에 따라 농가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각 지자체별로 채혈 실적에 따라 정책자금을 차등 지원하는 등 독려하였다.(이 당시 15.3%는 접종을 전혀 안하고 26.2%는 1회 접종만 하는 실정이었음) 날이 갈수록 전국 양돈인들의 자구 노력과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축협중앙회였다. 이 때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농·축협 통합문제로 극
양돈 생산자들, EU에 긴급 지원 요구유럽의 양돈 생산자들이 EU의 집행진에게 ‘현재의 위기 상황 - 낮은 돼지가격과 치솟는 사료비’ 에 필요한 긴급 지원 조치에 동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유럽연합의 양돈 규모는 최근에 밀 선물거래가격이 지난 6월 이후 70% 상승하자 감소하기 시작했다. 생산자들은 증가된 생산 가격을 높은 소비자 가격으로 떠넘길 수는 없다고 불평했다. EU 농장연합 Copa-Cogeca의 안토니오 타바레스(Antonio Tavares)씨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지금 고기가격에 대해서 더 높아진 생산 비용을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매업자들이 가격을 낮게 하려고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벨기에 플레미시(Flemish)지역 정부의 수장인 크리스 피터(Kris Peeters)는 이러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고, EU가 작년에 낙농 분야에 지원됐던 지원 조치들과 유사한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우리는 낙농 분야가 깊은 문제에 빠졌을 때 이런 회의를 가졌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유럽수준에서 무엇이 가능할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열아홉번째 이야기 방역본부 전신 ‘HC 비대본’(상)일본 수입돈육시장 주도권 잡기 호기…HC 근절 시급과제 재원 조성 모금운동에 김기용 회장 첫 2억원 쾌척 ‘기폭제’ 돼지콜레라 박멸 없이 미래 없다‘돼지콜레라박멸비상대책본부’의 주역은 당초 내가 아니었다. 석달 전 뜻을 같이하는 양돈산업 관련 22개 단체가 국회에 모여 돼지콜레라(이하 H.C.) 박멸 사업 추진에 합의하고 농어민신문사의 황민영 사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가장 선결문제인 모금운동을 시작하였으나 업계에서는 신문사에서 돈을 내라고 하니까 일종의 압력으로 여겨서 상당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1999년 7월 23일부로 부득이 내가 그 일을 떠안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 돼지고기 수입 시장의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대만에서 ’97년 3월 전국적으로 구제역이 만연하여 380만두를 살처분하고 대만 양돈산업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 우리 양돈업계로는 그야말로 위기이자 기회였으나 곧 일본이 H.C.백신 접종 중단을 예정하고 있어 우리도 빨리 접종중단 내지 박멸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실제 ’96년 3만t, ’97년 5만t, ’98~’99년에는 각각 8만t 이상, 금액으
열여덟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하)성장하던 사료, 조합과 갈등으로 결별…유통부문 재매입최선 다했지만 책임감…양돈인과 소원해진 관계 가슴아파조합으로 전환법인에서의 지분 구조상 한계가 있어 여러 검토 끝에 ’96년 2월 조합체제로 전환을 추진, ‘도드람 양돈축협’ 조합장에 진길부씨가 추대되었다. 나에게 초대 조합장(임기 1년)이라도 하고 넘겨달라고 했으나 나도 할만큼 했고, 회원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말도 많고 해서 회장 일에 어느 정도 정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원래 조합보다는 기업에서 배워 온 사람이고 요새말로 ‘靜的인 사람’ 쪽이라 조합장 같은 자리는 별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나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넘겨준다는게 내 소신이었다. 음성 사료공장은 월 2만6천t까지 풀가동을 하고도 모자라 인천 모 사료공장에서 OEM생산을 해서 음성공장을 거쳐 출고할 정도로 물량도 늘어났고 신뢰도도 높았다. 그러나 너무 잘 되는게 문제였다. 사료 쪽에서는 조합 운영비로 사료비의 3%를 주는게 너무 커 보였고 비 조합원 수수료 문제, 사료외상 등등 쟁점이 늘어나는데다 김대성, 진길부씨 두 대학동기간에 타협이 잘 안되었다. 김대성씨는
열일곱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중)“동태와 생태차이 아시죠” 자나 깨나 소비자 설득 ‘온힘’냉장육시대 본격화·국내산 돈육 대외경쟁력 제고 계기 ‘도드람 포크’ 위대한 탄생회원들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우리보다 10년쯤 먼저 시작한 일본 최고의 양돈그룹인 GPF(글로벌 피그 팜)과 사이보꾸에도 가보고, 양돈 계열화 모델을 찾기 위하여 미국 동부의 카길 계열화 농장, 샌드 라이브스톡 등을 방문하였다. 또 하노버 VIV-EUROPE(지금은 EURO-TIER) 가는 길에 네덜란드의 HENDRIX 사료·종돈회사, CAWI 기자재, 동물복지 양돈장 등을 두루 둘러보았다. ’92년 우리회사 민동수(현 대표이사)가 연수 다녀온 바네벨트 대학(PTC+)에도 가보고 우리도 양돈연수원을 하자고 다짐했고 실제 ’96년 3월 이천에 도드람 양돈 연수원을 설립했다. 당시 사료빈은 모두 사료회사들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우리는 제돈으로 설치하기로 했다.‘힘을 모으자’는 슬로건 아래 뭉치자고 했고 일본에 수출하자고 역설했다. 모두 신나게 일했다. KBS TV에서 1시간짜리 도드람 소개 프로가 나갔고, 이때의 차형훈 PD(한경WOW TV 사장 역임)도 도드람
열여섯번째 이야기 도드람, 자생적 조합을 꿈꾸다(상)필자 등 7명 사료공동구매 사업 시작…도드람 발기 모태음성사료공장 감격적 가동…회원농가 큰 호응속 속속 합류 도드람의 태동경기도 이천 소락 다방에서 무명회란 이름으로 모여 3년쯤 당시 현안을 고민하던 사람들과 함께 ’90년 7월, 무지개 사료 영업부장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온 이범호씨에게 농장에만 있지 말고 빨리 전체가 살 방안을 강구하자고 재촉하여 진길부, 이명우, 윤희진, 김동식 등 7명이 사료공동구매를 시작한 것이 도드람 발기의 모태가 되었다. 이 당시의 정서는 양돈사료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는 것과 UR 타결에 따른 위기의식 속에 협동조합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나도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어 중앙대 사회개발 대학원(대학원장 김성훈 교수) 협동조합 전공과정에 등록하였으나 기대하였던 것과는 달리 학위 받는 것 말고는 본질적인 문제에는 관심들이 적은 것 같아 도중에 그만두고 말았다. 나중에 김건호, 권순영 등이 합류하여 드디어 ’90년 10월 13명이 뜻을 같이하고 가칭 ‘이천양돈조합’ 간판을 달았으나 관에서는 뭐하러 따로 하느냐, 1도 1조합이 원칙이니 서울경기양돈조합으로 들
열다섯번째 이야기 양돈연구회 태동과 협회 활동(하)’05년 양돈대상 영광…상금에 자비 더 보태 연구기금 쾌척김건태 회장 뜨거운 열정에 의기투합…자조금 입법 등 도와양돈협회에 발을 들여 놓다대한양돈협회는 다른 한편으로 검정소 운영이나 농장검정문제를 두고 건건이 종축개량협회와 대립하고 종돈장들에게도 검정소 출품 요구를 반 협박식으로 하기에 우리들이 의무 규정을 삭제시켜 버렸다. 돼지고기 일본 수출 촉진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한국육류수출협회를 조직하고 안 맡겠다는 김강식 회장을 겨우 모셔왔는데 (’93년 3월 창립총회) 여기에 또 제동을 걸어 겨우 법인회원만 가입하는 조건으로 12월 26일 허신행 장관 퇴임 직전에 가서야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래저래 엇박자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양돈연구회는 그 후 사단법인화 되어 이길재 의원이 ’94~’99년까지 회장을 맡았었고 지금도 유능하고 젊은 후배들이 계속 발전시켜 나오면서 전국양돈세미나도 이제 28회를 넘어섰다. 매년 양돈대상도 수여하고 있는데 ’05년 10월 고맙게도 필자에게 ‘한국양돈대상’과 상금 500만원을 주길래 여기에 1천만원을 더 보태서 ‘10년 후 한국양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해 달라